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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ntitled with '술'
    村 學 究 2020. 2. 27. 11:06

    막걸리 한 병이 이내 비워졌다. 속에서 좀 더 달라한다. 사러가기도 귀찮고 해서 얼음 위스키나 한 잔 하려는데 어라, 항상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위스키 병이 보이질 않는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혼자 주절대는 와중에 부엌 쓰레기 통에 비워진 위스키 병이 보인다. 누군가 병을 쓰레기 통에 버린 것이다.

    내가 그랬을리 없다. 꽤 긴 기간동안 술병만 확인했었지 마시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러면 아내가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밤늦게 술 먹고 들어오다 크게 한 소리를 들었는데, 위스키는 말하자면 그 여파의 희생양으로 아내에 의해 버려졌을 것이라는 나름의 확신이 든 것이다.

    집에 온 아내에게 그걸 따져 물었다. 하지만 아내는 아니라며 펄쩍 뛴다. 몇 번을 되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마찬가지로 'no'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인가. 아내와 함께 몇 날 동안 집에서의 둘 간에 얽힌 동선을 맟추어 보았다. 한 동선이 잡혔고, 결론은 내가 위스키를 마시고 빈병을 쓰레기 통에 버린 것으로 나왔다. 물론 나는 마신 기억은 없다. 아내는 하지만 나의 기억을 파고들었다.

    위스키에 탈 얼음이 결정적인 것이었다. 냉동고에서 얼음을 꺼내려는데, 마침 얼음이 떨어지고 없었고, 나는 아내에게 빨리 얼음 좀 만들라고 채근했다. 얼음을 순식간에 만들 수는 없다. 아내는 만들 수가 없다 했고, 그리고는 안방으로 들어갔다는 게 아내의 기억이다. 아내는 그래서 내가 결국 그냥 스트레이트로 빈 병이 될 때까지 그 위스키를 마셨을 것이라는 말이다.

    아내가 그런 기억과 말을 처음 꺼낼 때만 해도 나는 결코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얼음과 냉동고, 그리고 스트레이트라는 말이 뭔가 나를 어떤 기억 속에서 꺼집어 내고 있는 듯한 게름칙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냉동고 문을 열다 그 문 모서리에 머리를 약간 부딪쳤을 때 느꼈던 통증, 그리고 그 통증과 함께 느껴지던 냉동실의 쏴-한 찬 냉기가 그 때서야 비로소 내 기억의 한 편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스트레이트로 한 잔 들이킬 때의 그 짜릿함도 그랬고.

    결국 나는 그 위스키는 내가 마셨고 내 스스로 쓰레기 통에 버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는 꼬랑지를 내리듯 수긍하며 주저내리는 나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리고는 한 마디 보탠다.

    "아무래도 치매 초기 단계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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