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마산 聖旨여고 배드민턴
    내 고향 馬山 2020. 5. 23. 08:25

    한국시간으로 1981년 3월29일 밤 10시경, 영국의 런던發 외신은 “동양에서 갑자기 혜성이 나타났다” 고 전 세계에 긴급 타전했고, 이 소식을 접한 우리 국민들은 환호한다. ‘동양에서 갑자기 나타난 혜성’은 누구인가. 그는 한국에서 온 19세의 당시 배드민턴 국가대표선수 황선애(당시 한국체대 2년)였고, 이 표현은 그녀를 가리킨 감탄調의 수사였다.

     

    황선애가 100년의 역사와 함께 세계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전 영국오픈 배드민턴 세계대회(전영오픈)’ 여자단식부분서 정상을 차지했던 것이다. 이는 한국 여자 배드민턴이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이래 국제대회 출전 15년 만에 이룬 쾌거로, 한국 배드민턴, 아니 한국 스포츠의 세계적 위상을 높여준 하나의 사건이었다. 한국선수가 전영오픈에 출전한 것은 이 대회가 처음이며, 전영오픈 우승은 곧 세계 1인자를 의미하기에 그 의미가 더욱 컸다. 황선애는 그로써 그해 1월 대만오픈과 일본오픈, 그리고 스웨덴오픈 정상과 함께 세계 4관왕에 오르는, 명실상부한 세계 배드민턴의 여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1981년 3월 30일 황선애의 '전영오픈' 여자단식 우승을 대서특필한 국내 언론기사)

     

    황선애의 전영오픈 제패로 그 위상이 한껏 더 높아지는 학교가 있었다. 바로 마산의 성지여고다. 당시 배드민턴하면 성지여고가 연상될 정도로, 성지여고는 한국 여자 배드민턴의 메카였지만, 여기에다 전영오픈을 석권한 황선애가 성지여고 출신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황선애의 이 해 전영오픈 석권을 계기로 성지여고는 그 후에도 이 대회에서 1986년 준우승(유상희), 1988년 우승(김연자), 1991년 우승(정명희)을 차지하는 등 전영오픈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된다.

     

    (황선애의 성지여고 선수시절 모습)

     

    지금은 한국의 남녀 배드민턴이 각종 세계대회를 석권하는 등 세계적인 강국이 되고 있지만, 기실 우리의 배드민턴 역사는 일천하다. 우리나라에 배드민턴이 들어와 대한배드민턴연맹이 조직된 게 1957년이다. 50여년을 좀 넘긴 짧은 역사에서 이런 위상을 구축한 배경에는 뭔가 견인차가 있었을 터인데, 그 게 바로 성지여고다. 성지여중과 함께 성지여고에 배드민턴부가 생긴 것은 1962년이다.

    성지여고 배드민턴부의 창설과 발전에는 당시 윤학술 교장수녀와 그 후 김영옥 교장수녀의 힘이 컸다. 윤 교장수녀는 창단에 힘을 실어줬고, 김 교장수녀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교장수녀는 특히 ‘건강한 몸에 건전한 정신’을 교육이념으로 삼았다. 성지여고 부임 전에 재직했던 전주 성심여고와 대구 계성여고에는 탁구부를, 부산의 테레사여고에는 체조부를 창단해 학생들로 하여금 즐기게 했고, 이를 통해 이들 학교에서 국가대표급 선수를 배출해 냈다. 성지여고에서는 배드민턴이 그 다음 차례였던 것이다.

    이들 두 교장수녀와 함께 오늘의 성지여고 배드민턴이 있기까지 그 공로자로 임동명 교사를 꼽는데 있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지여고 배드민턴부 그 자체가 임 교사의 학교 부임을 계기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대구상고와 연세대에서 농구를 한 임동명이 1961년 10월 성지여고에 부임했을 때는 원래 농구를 맡기로 했었으나, 우연히 미군들이 배드민턴하는 모습을 보고, 여학생들에게 알맞은 운동이라고 판단해 학교에 건의, 이에 윤 교장수녀와 학교 측이 전폭적으로 밀어줘 1962년 3월에 배드민턴부가 창단된다.

    1962년에 만들어진 성지여고 배드민턴부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그로부터 3년째인 1964년이다. 그 해 인천에서 개최된 제45회 전국체전에서 3위를 차지한 후, 같은 해 12월 전국 학교대항대회 겸 제5회 아시안게임선수권선발대회에서 준우승함으로써 전국 배드민턴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선수권선발대회에서 맹활약을 보인 김순옥은 선발선수로 선정된다.

    이 정도 성적을 내기까지 임동명의 노고가 컸다. 경기규칙마저 변변히 잘 모르고 있던 임동명은 서울과 대구를 오가면서 어깨너머로 배드민턴규칙과 지도방법을 익힌다. 초창기에는 장비 또한 부실하기 그지없었는데, 이는 당시 우리나라 배드민턴의 현실이기도 했다. 대구의 미8군에서 쓰던, 나무로 된 프레임 라켓과 고무공 정도로 시작했다. 이런 장비를 갖고 임동명은, 스스로 익힌 배드민턴기술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 기술이란 자신이 배운 농구의 스텝동작이나 트레이닝 방법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농구기법을 혼합한 이 방법으로 임동명은 배드민턴의 동작기술 20가지를 고안해 내 학생들에게 시키고 가르쳤다.

    이런 초보적인 방법에 의존한 기술이니 경기측면에서 좋은 성적이 나올 수 있겠는가. 성지여중. 고는 창단초기 2년 동안 여러 대회에 참가했지만,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는 참담한 결과를 나타내면서 배드민턴부 해체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임동명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좋지 않은 여론과, 닭털을 모아 본드로 붙여가며 훈련을 할 정도로 라켓과 셔틀콕마저 쉽게 구할 수 없었던 악조건 속에서도 학생선수들의 기초체력 육성을 위한 러닝과 웨이트 트레이닝, 그리고 기술개발 등을 통해 피나는 훈련을 시켰다. 이에 따라 창단 3년째부터 그 결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성지여중이 1965년 3월 전국추계배드민턴리그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후 1966년 47회 전국제전에서도 우승하는 한편, 성지여고는 이 대회에서 준우승을 엮어낸다. 이어 여중선수들이 그대로 성지여고에 입학한 1967년 제5회 춘계종별대회에서 성지여고는 대망의 여고부 우승을 일궈냈으며, 이후 10여 년 간 춘계종별대회, 전국체전, 추계종별대회, 전국학교대항대회 등을 모조리 석권함으로써 국내에서는 그 맞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명실상부하게 여자 중. 고 배드민턴의 강자로 그 명성을 쌓아간다. 이에 즈음한 시기에 황선애가 전영오픈을 제패함으로써 성지여고는 배드민턴으로써 국위를 선양하는 학교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성지여중. 고 배드민턴의 강세는 물론 선수들에 대한 보살핌과 끊임없는 기술개발 등을 통한 임동명의 지도력과 선수들의 강도 높은 훈련 때문이다. 특히 임동명의 경기에 대비한 각종 트레이닝은 혹독한 것이었고, 이 훈련을 감수한 선수들의 정신력 또한 대단한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학생선수들은 평소에는 하루 5시간씩, 그리고 대회직전이거나 방학기간에는 8-10시간의 강력한 훈련을 소화했다. 종아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복도로를 달리는 것은 기본이고, 무학산을 25분 내에 오르내리는 훈련도 받았다. 50년만의 혹한이라고 일컬어지던 1976년과 1977년 겨울에도 선수들은 무학산을 쉼 없이 오르내리는 강훈련 속에 체력과 경기력을 연마했을 정도다.

    이 시기 성지여중. 고 배드민턴의 성적을 한번 들여다보면 가히 상대가 없을 정도의 놀라운 기록이다. 1965년 제3회 춘계종별대회 이후 1982년 4월의 20회 대회까지 성지여중 12회. 성지여고 15회 우승, 1967년 제48회 전국체전부터 1982년 62회 체전까지 성지여고 13회 우승, 1981년 5월까지 전국학교대항대회 성지여고 연속 12회 우승, 그리고 1981년 9월까지 추계종별대회 성지여고 연속 8회 우승 등은 당시의 기록으로도 전무했지만,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후무의 기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기록은 1982년까지도 이어지는데, 그해 10월에 치러진 제63회 전국체전에서 역시 우승을 차지한 성지여고에 대해 그해 10월19일자 경향신문은 “전국체전 20년간 출전해 16회 우승이라는 찬연한 대기록을 세웠다”고 대서특필, “성지여고는 세계적인 배드민턴 스타 황선애와 국가대표 김연자 등을 배출하면서 한국 배드민턴의 산실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크게 부각시키면서 “특히 1979년부터 1981년까지 황선애와 김연자의 종횡무진 활약으로 3년 연속 전국 6개 대회를 석권하는 황금기를 구가하기도 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임동명 코치는 이런 공로로 1981년 4월 제19회 대한민국체육상을 수상한다.

    성지여고 배드민턴이 국내에서는 상대가 없을 정도로 승승장구했지만, 움츠려들 때도 있었다. 전국의 다른 학교 팀들이 성지여고를 겨냥해 실력을 쌓아가고 있을 무렵인 1983년경인 데, 이 무렵부터 수년간 계속해서 2, 3위권에 맴돌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제30회 전국종별대회 단체전에서 우승한 것을 계기로 침체기를 벗어나 다시 강자로 부상한다. 이즈음은 어떤가. 전국적으로 경기수준이 상향평준화된 것과 성지여고에 대한 견제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성적이 전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배드민턴하면 성지여고라는 강자의 면모는 지켜가고 있다. 2014년 추계종별대회에서 성지여고는 예선 4전전승의 기록으로 공주여고를 결승에서 3대1로 꺾고 우승했다.

    국내에서의 성지여고 배드민턴의 이런 활약은 나라밖으로도 이어져 각종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데, 1982년 황선애가 전영오픈을 석권함으로써 그 정점을 찍는다. 성지여고 배드민턴은 1960년대 후반부터 국제경기를 가지기 시작하는데, 주로 일본으로부터의 초청경기가 그 주류를 이뤘다. 패권을 겨루는 국제대회 참가는 1968년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국제학생선수권대회인데, 이 대회에서 성지여고는 준우승을 거둔다.

     

    (1991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배드민턴 복식 금메달리스트인 황혜영)

     

    이어 1969년 필리핀 마닐라에서의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 주니어 여자단식에서 배효련. 윤임순. 한숙이. 손덕숙이 각각 1. 2. 3. 4위를 차지해 기염을 토한다. 이와 관련해 당시 지역신문인 경남매일은 사설까지 게재할 정도였다. 유럽 등 아시아권을 제외한 지역으로 국제경기의 폭을 넓힌 시기는 1990년대 중반으로, 매년 각종 국제경기대회에 참가해 좋은 성적을 거둠으로써 배드민턴 명문으로서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복식에서 금메달을 딴 황혜영도 성지여고 출신이다. 성지여고는 2015년 독일에서 개최된 주니어오픈선수권대회에서 여자복식 1위와 혼합복식 2, 3위의 성적을 기록했다.

     

    (성지여고 코치시절의 황혜영)

     

    성지여고 배드민턴은 마산 배드민턴의 역사와 그 궤를 함께 하면서 그 수준을 전국 최고수준으로 올려놓은 공로가 있다. 성지여고 배드민턴 선수들이 경남대로 진학하면서 경남대를 배드민턴 여자대학명문으로 만들었고, 그 선수들이 옛 마산시청 선수가 돼 활약한 것이다. 1981년 창단된 완월초등학교 배드민턴이 1982년 소년체전에서 전국의 강자로 부상한 것도 성지여고 배드민턴에 힘입은바 적지 않다.

    2015년 5월 제주도에서 개최된 44회 소년체전에서도 완월초등학교는 김유정이 단체전 우승을 했다. 김유정의 아버지가 현재 성지여고 배드민턴을 지도하고 있는 김범식 감독이다. 김 감독의 다른 두 딸도 모두 완월초등 출신인데, 모두들 소년체전에서 금메달을 땄고, 국제대회를 제패한 배드민턴 유망주다. 김 감독과 함께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황혜영이 현재 코치를 맡아 후배들을 가르키고 있다. 김 감독과 황 코치의 지도아래 성지여고는 2015년 7월 제 58회 전국여름철종별배드민턴선수권대회 여고부 단체전을 석권해 이 대회 3연패의 기록을 달성했다.

    (사진은 1981년 황선애의 '전영오픈' 여자단식 우승 소식을 대서특필한 국내 언론기사와 황선애의 성지여고 선수시절 모습, 그리고 1991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 배드민턴 복식에서 금메달을 딴 황혜영과 그녀의 성지여고 코치 시절의 모습)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