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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은선과의 얄궂은 同病相憐

김상지 2010. 9. 6. 16:43

어떻게 결말이 날지는 모르지만,

오 은선의 칸첸중가 등정을 둘러싼 논란을 보고 있자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정상에 올랐다는 팩트는 본인이 제일 잘 안다.

본인이 갔다고 하면 간 것이다.

극지의 극한적인 상황에서 혼란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오 은선 혼자 간 게 아니지 않은가.

셀파를 세명이나 데리고 간 상태에서

오르지 않은 것을 올랐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셀파 세명 중 한명의 이상스런 증언으로 이 논란이 시작됐는데,

오늘 들어온 외신을 보니 그 누르마라는 셀파의 증언이

아무래도 수상쩍게 보인다.

히말라야 8천미터급을 오르려면 걸리적거리게 어디 한 두가지인가.

스폰서도 붙어야 하고 방송사도 있어야 한다. 상업성이다.

덧붙여 등정자 간의 경쟁 내지는 국가 간 경쟁도 유발시킨다.

이런 상업성 내지 경쟁심 뒤에 도사린 음모론도 있을 수 있다.

이러니 조그마한 끄트리만 잡혀도 굉장한 논란을 유발시킬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을 바다가 있는 마산에서 자랐다.

그 시절은 목숨을 걸고 헤엄을 쳤다.

그러다가 많이들 바다에서 빠져 죽었다.

그 무렵의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

같은 동네 동무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런데 시체가 떠 오르지 않는다.

부모님은 배를 띄웠다. 무당을 태운 채.

그 배는 동무가 빠진 바다를 하루 종일 맴돈다.

황혼 무렵, 무당은 북을 치며 굿을 하고,

부모는 꺼이 꺼이 울며 아들의 이름을 부른다.

 

그 시절, 그런 우리에게 좋은 도전이 있었다.

마산 앞바다에 있는 고래돝섬까지 헤엄쳐 갔다오는 것이다.

거리가 왕복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코스다.

나는 국민학교 4학년 때 그 곳을 갔다 왔다.

직선코스로 제일 가까운 곳인 '미창' 앞바다에서

'웃기'(고무튜브)를 띄우고 갔다 온 것이다.

당시 현장에 증인이 몇 있었다. 동무들이다. 너댓명 쯤 됐을 것이다.

 

반세기가 지난 어느 날, 친구들에게 그 얘기를 했다. 한마디로 묵사발 됐다.

거짓말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긴 거리를,

국민학교 4학년짜리가 왕복했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냐는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형국이었다. 내 말을 절대로 믿지 않는 것이었다.

시간 있을 때마다 증거를 모았다. 옛 고향 분들께 물어보기도 하고

마산 내려갈 때마다 증언과 증인을 확보했다.

지난 8월 중순, 마산 갔을 때 결정적인 증인들이 나타났다.

현장에 같이 있었던 영수가 전화를 통해서 증언을 했고,

또 당시 갔다 온 친구들이 몇 명 나서 증언을 해준 것이다.

의기양양해졌다. 반격의 기회가 온 것이다. 

나를 매도했던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줬다.

그러나 나는 또 당했다. 이번엔 아주 '파렴치한'으로 몰아 부치는 것이다.

나의 주장을 맞추기 위해 이번엔 순진한 친구들을 매수했다는 것이다.

물론 농담삼아, 아니면 재미있으라고 한 얘기들이지만

일면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경우를 겪으면서 문득 오 은선이가 생각나는 것이다.

나는 오 은선이 칸첸중가를 올랐고,

여성으로서 세계의 첫 히말라야 14좌 등정자로 보고 있다.

오 은선이는 나를 물론 모를 것이지만,

그 녀도 내 경우를 알면 나의 손을 들어주리라 믿는다.

얄궂은 동병상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