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타시켄트에서의 어느 平壤여성을 回想함
김상지
2019. 8. 1. 14:12
당부사항이 있었다. 호텔 20층엔 올라가지 마라. 그러나 우리는 그 것을 무시했다. 오랜 비행 끝에 도착한 타시켄트는 말 그대로 찜통 그 자체였다. 비행기에서 내리려는데, 좀 아는 여 승무원이 비닐봉지에 뭔가를 싸준다. 술이다. 조그만 병의 와인들. 그 가운데 비행기 안에서 마시다 남은 위스키가 한 병쯤 있었다. 그 술을 방송기자인 후배와 호텔 방을 잡고 각자 기사를 송고하고 난 후 나눠 마셨다. 이열치열이라든가. 너무 더워서 마셨을 것이다. 술기가 올랐다. 취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뻗쳤다. 호텔20층, 가지 말라던 곳 아닌가. 반바지 차림으로 20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끝에 무슨 네온사인이 번쩍거린다. 한글로 뭐라고 써놓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豪氣와 호기심 반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끌벅적한 실내. 그러나 어두컴컴해 잘 안 보인다. 노래가 흘러 나온다. 귀에 익은 노래다. 현철의 노래. 사랑은 얄미운 나-빈가봐 하는. 그곳은 북한이 운영하는 술집이었다. 한국관리와 기자들이 타시켄트에 온다니까 정략적으로 급조해 놓은 술집, 그런 술집이란 게 한 눈에 들어왔다.
어둠이 눈에 익어지니 테이블이 드러난다. 올망졸망 앉아있는 면면들을보니 안면들이 있다. 우리 기자들이었다. 테이블을 하나 차지해 앉았다. 여자가 한 명 앉는다. 어디서 왔느냐? 평양이에요. 평양? 예, 평양이에요. 갸름한 얼굴이다. 엷은 화장을 했는데, 나이가 좀 들어보인다. 맥주를 시켰더니 하이네켄이 나온다. 하이네켄 4병에 마른 안주 하나. 후배, 그리고 그 평양여자와 나눠 마셨다. 무슨 얘기들을 주고 받았던 것 같은데, 취기가 많이 올랐던지 기억에없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계산서를 달라고 했다. 쌌다. 모두 합해 12달러. 백달러짜리를 꺼내 계산을 하고 나머지 돈을 받았다. 그 돈을 평양여자에게 모두 팁으로 줬다. 그 전에 물어 본 말이 있다. 여기서 근무하면 한 달에 얼마를 받느냐? 20달러라고 했다. 4개월어치 이상의 돈을 그 평양여자에게 팁으로 준 것이다.
호텔의 내 방 맞은 편에 잘 아는 선배기자가 있었다. 더운 날씨에 냉방도 엉망이라 모두들 방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시간은 야심해 가는데, 나는 아직까지 방에 들어오고 있지 않다. 이 친구는 어디를 갔을까. 그 무렵 복도가 저벅거린다. 선배가 복도 쪽을 바라다보니 내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니다. 뒤에 어떤 여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저 친구, 왜 저러지. 저 여자는 뭔가? 여기서 이상한 짓 하다가는 그야말로 골로가는 수가 있다는데, 어찌하나. 선배기자는 내가 내심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후에 듣기로 그 선배는 여차하면 말릴 작정이라고 했다. 방문이 활짝 열려져 있지 않은가. 그러니 방에서 무슨 짓 하는 게 다 보일 것이라 그 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그 여자는 20층, 북한 술집 내 옆에 앉았던 그 평양여자였다.
나는 우선 그 여자를 편안하게 앉혔다. 그리고 달랬다. 긴장하지 마라. 그 말에 그 여자는 더 긴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그 여자는 어떻게 해서 나를 따라 내 방에 오게된 것일까. 분명 내가 뭔가 ‘미끼’를 던졌을 것이고, 그여자는 그 것에 이끌렸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많은 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가 나를 따라 온 것은 대단한 배짱이 아닌가 싶다. 여자를 앉혀놓고 나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큰 가방이나 쇼핑백, 아니면 대형 비닐봉투가 필요했다. 뭔가를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당국은 서울을 출발하기전 우리들에게 당부를 했다. 먹을 것을 준비하라는 것. 그리고 모기약과 해충약, 그리고 상비약 등도 챙기라고 했다. 먹을 것이 마땅치 않을 것이고, 여러가지 위생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남대문시장엘 가서 이것 저것 등을 준비했다. C-레이션과 통조림, 라면, 각종 반찬통조림 등도 챙겼다. 그 것들이 내 방 냉장고 속에 그대로 들어있었다. 그런데 막상 타시켄트에 도착한 후 그 것들이 필요가 없어졌다. 우리 국적 항공사에서 상황을 보고 조치를 취한 것인데, 현지에 간이식당을 만들어 식사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호텔 냉장고는 거짓말 좀 보태 집채 만 했다. 게다가 붕붕대는 소음은 또 얼마나 크던지 잠을 이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육중한 냉장고문을 열고는 서울서 가져 간 모든 것들을 꺼내 모기장에다 담기 시작했다. 있는 것을 하나도 남기지않고 몽땅 담았다. 모기장에 싸여진 짐은 꽤 크고 부피가 나갔다. 나는 평양여자더러 그 것을 갖고 올라가라고 했다. 내가 그 평양여자를 데리고 내 방에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게 목적이었다. 무슨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나는 무슨 마음으로 그 여자에게 그런 제의를 하고 데려왔을까. 그리고 또 그 여자는 무슨 마음으로 아무런 의심없이 따라왔을까. 그와 관련해 딱히 집혀지는 기억은 없다. 평양여자가 짐을 들고 일어나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를 해주고 싶었다. 잘 가시오. 그리고 통일될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 있으시오. 아마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싶다. 그 여자도 나에게 분명 무슨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에 없다. 그 말을 기억에 담아 새겨두고 말 감정의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후진국에 출장을 가면 돈 쓸 일이 별로 없다. 타시켄트도 그랬다. 그곳은 그 무렵 서너 명이 한 사흘 먹을 수 있는 체리 한 광주리가 1달러였다. 우리들은 체르노빌이 여기서 멀지 않아서 그렇다면서도 체리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하이네켄맥주 한 병에 1 달러도 안 됐고, 스웨덴산 압술루트 보드카 큰 거 한 병이 10 달러였다. 출장비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백 달러짜리가 한 서너장 남아 있었을 것이다.그 돈도 그 평양여자에게 건넸다. 부디 잘가시오.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 남으시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리 술김이라도 간 큰 짓을 했다. 오해 살 일도 분명히 했다. 평양여자를 내 방에 데려간 사실을 알고있는 기자들이 어떤 식으로 옭아매도 나는 할 말이 없었을것이다. 또 기자단과 당국에서 나에게 어떤 조치를 내린다 해도 달게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주 한 방의 선배기자 때문에 최소한 그런 오해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선배기자가 내 방에서 그 시간에 일어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봤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다.
지금도 어쩌다 한 번씩 그 평양여자가 생각난다. 북한 내부가 좀 시끄럽고 남북 간에 긴장된 이슈가 발생하면 그렇고, 종편 방송의 북한관련 프로에 나오는 자유를 찾은 탈북 여성들을 볼 때도 그렇다. 그 평양여자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여 탈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됐든 그 때 내 당부대로 살아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어떻게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