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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된 술

김상지 2010. 10. 7. 13:53

남의 일은 감놔라, 배놔라 하고 챙기려 하면서도 막상 자기 일은 置之度外한다.

이기(利己)라는 측면의 나쁜 의미를 들이대려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한 일은 잘 모르고 넘어간다는 뜻으로 이해해달라.

술이다.

술, 지금도 많이 마시지만 잊고 산 게 있다.

 

군대 후배와 만났다.

옛 군 시절 얘기가 술술 나온다.

술잔을 마주하며 후배가 말 한다.

 

김 형, 아직도 술 마시는 게 참 신기하오.

신기하다니?

그 때 그렇게 많이 마시고 몇 번을 죽을 뻔 해놓고도 아직도 마시고 있으니.

 

1975년 가을 무렵이 떠올려진다.

코스모스가 만발한 청명한 가을날 일요일.

빨래하기 좋은 날이다. 빨래나 하자.

제대말년이니 빨래의 의미는 좀 각별할 것이다.

군 생활을 털어버리자. 그리고 이제 사회 나갈 참이니 좀 칼클께 보이자.

'졸병'들 모두 외출 보내놓고 오전 내내 빨래만 했다.

빨래를 끝내고 사무실로 오니 제일 신참인 덕은이가 어디서 나타나 수줍게 다가온다.

 

와, 할 말 있나?

예, 아무도 없는데 술이나 한 잔 하시죠.

술? 좋지.

 

둘이는 영농장 부근 햇빛이 따사로운 계단 위에 앉았다.

덕은이는 PX에서 가져온 경월소주 두 병과 조개맛살 안주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두 병이 네 병, 네 병이 여섯 병, 여섯 병이 여덟 병.

그리고 개구멍으로 들어오던 귀대병이 건네 준 네홉들이 소주들.

얼마나 마셨는지 모르겠다.

날이 어둑해졌을 것이다. 덕은이의 얼굴이 내 앞으로 확 다가온다.

그 걸로 모든 기억이 사라졌다.

그리고 새벽. 중대본부 교보재창고 침대에 뉘여져있었던 모양이다.

혀가 말린다. 말린 혀가 속으로 빨려 내려간다. 혀를 꺼내야 한다.

손을 입에다 넣고 혀를 빼려고 아둥바둥했던 모양이다.

죽을 만큼의 탈수증이 온 것이다. 물, 물, 오로지 물, 그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

밀폐된 교보재 창고의 창문에서 떨어져 내리고, 중대본부 창문에서 뛰어 내리고.

기어기어 수돗가로 갔더니 물이 잠겼다. 다시 취사장. 그러나 물은 없다.

사무실 뒤로 개천이 흐른다. 수량이 꽤 많은 개천이다. 결국 그리로.

그리고 눈을 뜨니 내무반이다. 무려 반나절을 의식없이 누워있었다는 것.

위생병 공 병장 왈,

 

정말 재수 좋다. 사진부 암실작업병이 오줌을 화장실에 누러 갔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사흘 간을 그렇게 누워 있으면서 먹은 것이라곤 '깐 포도 통조림.'

그 것밖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 얘기를 후배와 서로 기억을 맞춰가며 하는데,

그 후배가 또 묘한 표정이다.

 

김 형, 그 게 몇 년인가, 아마도 75년이었지요?

맞다. 1975년이다. 와 씹나?

 

후배는 35년 전 죽도록 마셔대던 사람과 다시 술을 앞에 놓고 있는 게

좀 거시기하고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설마 귀신은 아니겠지 하는.

35년이라는 세월이 문득 뇌리 속에 휘감겨 온다.

35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마시던 술을 지금껏 마시고 있다.

나는 무엇이고 그 술은 무엇인가.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술은 알겠다.

오래된 술이다.

나에게는 오래 된 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