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2000년도 초반 종로 3가 뒷골목에 ‘목포집’이라는 식당 겸 주점이 있었다. 목포 아주머니가 전라도 특유의 솜씨로 각가지 조리의 홍어를 내놓는데, 맛이 있어서 손님들이 많았다. 한 대여섯 명 앉으면 꽉차는 좁은 집이었는데, 아주머니는 그 집에서 돈을 벌어 지금은 옛 피카디리 극장 곁 골목 큰 집으로 옮겨갔다.
당시 언론재단 강사로 있으면서 강의 후 기진맥진하면 기력 보충 차원에서 그 집의 ‘홍어애탕’을 먹으러 자주 가곤했는데, 간혹 곁들여진 한잔 술이 밤 늦도록 이어지곤 했다. ‘목포집’은 내가 드나들기에 송구스러울 정도로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 단골이 많아, 느지막한 저녁 무렵이면 한잔 술에 취한 어르신들이 부르는 흘러간 옛노래가 골목 안에 가득하곤 했다. 이런 어르신들의 취향에 맞게 기타로 노래 반주를 해 주는 ‘길거리 악사’도 한 분, 그 집에 저녁이면 거의 출근하다시피 했다.
어느 여름날 저녁, 친구와 함께 시작한 낮술이 저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는데, 주방에서 음식을 장만하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오라버니!” 하면서 반가움으로 맞이하는 한 분이 들어오고 있었다. 바로 송해 선생이었다. 그 집에 선생을 비롯해 흘러간 연예인들이 자주 들린다는 얘기를 듣고는 있었지만, 막상 송해 선생을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선생은 혼자 자리에 앉자말자 소주를 시키고는 한잔을 좀 급하게 마시고는 “캬 -“ 했다. 그리고는 비운 잔을 거꾸로 우리들 앞에서 익살스럽게 흔들면서 터는 시늉을 했다. 선생의 그런 모습이 참 친숙하고 인상적이어서 우리들은 엉겁결에 목례를 했다. 아주머니는 볏짚을 깔아놓은 단지에서 숙성된 홍어를 꺼내 듬성듬성 썰어 선생에게 안주로 내 놓았다. 선생이 평소 애주가라는 얘기는 많이 듣고있던 참이어서, 선생의 술 마시는 모습을 좀 눈여겨 봤는데, 한 마디로 혼자서도 술을 아주 맛있게 드시는 타입이었다. 짬이 나면 주인 아주머니가 선생 곁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다정한 남매 같아 보이기도 했다.
밤이 되면서 선생도 우리들도 취해갔다. 그 무렵 골목 초입에서부터 흘러간 노래 기타 멜로디가 들려오고 있었다. 길거리 악사였다. 악사는 ‘목포집’으로 들어오면서 송해 선생을 알아봤고, 그 즉시 선생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인사를 드렸다. 두 분은 서로들 익히 잘 아는 사이 같았고, 몇 마디 주고받더니 이내 악사는 기타를 들고 일어서 전주를 타기 시작했다. 최병호 선생이 불렀던 ‘아주까리 등불.’ 나에게는 귀에 익은 멜로디다. 그 노래를 선생이 부르기 시작했다. “피리를 불어주마 울지마라 아기야…” 취기가 오른 선생의 목소리는 다감하면서도 구수했고, 어머니를 그리는 구슬픈 그 노랫가락엔 딱 들어맞았다.
1절이 끝나면서 좁은 주점에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2절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 때 선생은 노래를 시작하질 않고 뭔가를 큰 목소리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바로 대사였는데, 선생이 즉흥적으로 지은 것으로 기타 간주를 타고 애절하게 그리고 생동감있게, 그리고 연기감을 더해 어머니를 절절이 그리워하고 있었다. 대사 속에 몇 차례 어머니를 부르는 대목은 애절하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했고, 대사를 읊는 선생도 거의 울부짖음으로 어머니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선생은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는 두 손을 모은 상태로 북쪽을 향해 머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 잠시 간의 시간이었지만, 그 모습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영원에 머물고자 하는 모습 같았다. 주점 안은 선생의 그런 모습에 잠시 정적이 흘렀고, 모두들 일어섰다. 그리고 이내 기립박수로 선생의 노래에 화답했다.
그 날 이후로도 종종 ’목포집’에서 선생을 뵐 수가 있었고, 그때마다 선생은 기타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아주까리 등불’은 선생의 십팔번이었고, 이 노래와 함께 ‘울고넘는 박달재’ 등 선생이 부르는 노래들은 하나같이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들이었다.
‘아주까리 등불’에서 선생이 읊는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 여자인 듯한 어떤 이름이 나오는데, 나는 그게 누군지 긍금했다. ‘복희’로 들렸는데, 예컨대 “… 복희는 오늘도 울고있습니다…”라는 대목 등에서 언급되는 이름이다. 나는 그 이름이 선생의 황해도 재령 고향에 두고 온 오누이려니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복희’라는 이름이 바로 송해 선생의 본명이라는 것을 선생이 별세했다는 부고기사를 접하고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