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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시켄트, 어느 平壤여자를 회상함
    카테고리 없음 2010. 8. 31. 15:44

    북한은 뜨거운 감자같은 존재다.

    다가가 쉽게 주워 담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쉽게 내쳐버릴 수도 없다.

    같은 땅, 같은 민족이지만 두 가지 극명하게 대립되는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김 정일, 그를 생각하면 인간말종이라는 비하감에 더해 치가 떨린다.

    어찌 자기가 다스리는 사람들을 그렇게도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지옥으로 내몰 수가 있는가.

    이념을 내세운다. 이념이 무섭기는 무섭다.

    그러나 김 일성, 김 정일이 그들 만의 이념을 수호하고 보지하기 위해

    그렇지 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악마의 근성을 지녔다. 아니 악마에 다름아니다.

    악마가 아니고서는 사람들을 그렇게 다룰 수가 없다.

    북한주민들은 이런 악마들의 휘둘림에 몰리고 있는,

    북한 하면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대상이다.

    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멍해진다.

    무슨 가혹한 운명을 태어났기로,

    반세기를 넘어까지 그런 지옥에서 고초를 당하고 있는 것인가.

    올해에도  북한의 식량난은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굶어죽는 동포들이 또 다시 속출할 것이고,

    북한이라는 凍土는 이들의 신음에 휩쌓일 것이다.

    최근에는 물난리까지 더해 주민들을 더욱 어렵게하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이다.

    북한주민들의 이런 어려운 소식을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1990년대 초반, 북한이 이른바 '고난의 대행군'이라는 구호아래

    식량난 등을 주민들의 勞力과 고초로 배수진을 칠 무렵,

    우즈베키스탄의  타시켄트에서 만난 한 平壤여자이다.

                                            

     

    당국으로부터 당부사항이 있었다. 호텔 20층엔 올라가지 마라.

    그러나 우리는 그 당부사항을 무시했다.

    오랜 비행 끝에 도착한 타시켄트는 말 그대로 찜통 그 자체였다.

    잘 아는 스튜어디스가 비닐봉지에 뭔가를 싸준다. 술들이다.

    조그만 병의 와인. 그 가운데 마시다 남은 시바스 리걸이 한 병 있었다.

    방송기자인 후배와 그 술을 나눠 마셨다. 술기가 올랐다.

    취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뼏쳤다.

    호텔 20층, 당국이 가지 말라던 곳 아닌가.

    반바지 차림으로 20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끝에 무슨 네온사인이 번쩍거린다.

    한글로 뭐라고 써놓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豪氣와 호기심 반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끌벅적한 실내. 그러나 어두컴컴해 잘 안 보인다.

    노래가 흘러나온다. 귀에 익은 노래다. 현 철의 노래.

    사랑은 얄미운 나-빈가봐 하는.

    그 곳은 북한이 운영하는 술집이었다.

    한국 관리와 기자들이 타시켄트에 온다니까 정략적으로 급조해 놓은 술집,

    그 게 한 눈에 들어 왔다.

    어둠이 눈에 익어지니 테이블이 드러난다.

    올망졸망 앉아있는 면면들을 보니 대충 안면이 있다. 기자들이었다.

    테이블을 하나 차지해 앉았다. 여자가 한명 앉는다.

    어디서 왔느냐? 평양이에요. 평양? 예, 평양이에요.

    갸름한 얼굴이다. 엷은 화장을 했는데, 나이가 좀 들어 보인다.

    맥주를 시켰더니 하이네켄이 나온다. 하이네켄 4병에 마른 안주 하나.

    후배, 그리고 그 평양여자와 나눠 마셨다.

    무슨 얘기들을 주고받았던 것 같은데, 취기가 많이 올랐던지 기억에 없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계산서를 달라고 했다. 쌌다. 모두 합해 12달러.

    백달러 짜리를 꺼내 계산을 하고 나머지 돈을 받았다.

    평양여자에게 그 돈을 팁으로 줬다.

    그 전에 물어 본 말이 있다. 여기서 근무하면 한 달에 얼마를 받느냐.

    20달러라고 했다.

    4개월 어치 이상의 돈을 그 평양여자에게 팁으로 준 것이다.


    호텔의 내 방 맞은 편에 잘 아는 선배기자가 있었다.

    더운 날씨에 냉방도 엉망이라 모두들 방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시간은 야심한데, 나는 아직까지 방에 들어오고 있지 않다. 어디를 갔을까.

    그 무렵 복도가 저벅거린다.

    선배가 복도 쪽을 바라다보니 내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니다. 뒤에 어떤 여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저 친구, 오늘 사고 낼 게 분명하다.

    어찌해야 하나. 여기서 그 짓하다가는 자칫 골로 가는 수가 있다는데, 어찌하나.

    선배기자는 내심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해서 여차한 경우 개입하기로 하고 지켜보기로 한 모양이다.

    방문이 활짝 열려져 있어 방에서 무슨 짓 하는 게 다 보여 그게 가능할 터.

    그 여자는 다름이 아니라 20층, 북한 술집에 있던 그 평양여자였다.

    나는 우선 그 여자를 편안하게 앉혔다.

    그리고 달랬다. 긴장하지 마라.

    그 말에 그 여자는 더 긴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건 그렇고 그 여자는 어떻게 해 나를 따라 내 방에 오게 된 것일까.

    분명 내가 뭔가 ‘미끼’를 던졌을 것이고, 그 여자는 그 것에 이끌렸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많은 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가 나를 따라온 것은 대단한 배짱이 아닐 수 없다.

     

    여자를 앉혀놓고 나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큰 가방이나 쇼핑백, 아니면 대형 비닐봉투가 필요했다.

    뭔가를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 서울에서 갖고 온 휴대용 모기장이 있었다.

    그 것이면 많은 것을 담을 수가 있었다.

    타시켄트로 올 때 정부당국은 먹을 것을 최대한 준비하라고 했다.

    먹을 게 신통치 않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모기와 벌레 등 해충을 방지키 위한 장비도 준비토록 했다.

    우리들은 남대문시장엘 가서

    미군 C-레이션과 통조림, 라면, 각종 반찬 통조림 등을 준비해 갔다.

    그 것들이 냉장고 속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

    타시켄트에 도착하니 우리 국적항공사에서 상황을 보고 조치를 취했다.

    간이식당을 만들어 식사를 제공하는 바람에

    그 것들이 아무런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호텔 냉장고는 거짓말 좀 보태 집채만 했다.

    거기다가 붕붕대는 소음은 또 얼마나 컸던지 잠을 이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육중한 냉장고 문을 열고는

    서울서 가져간 모든 것들을 꺼내 모기장에다 담기 시작했다.

    있는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몽땅 담았다.

    모기장에 싸여진 짐은 꽤 크고 부피가 나갔다.

    평양여자더러 그 것을 갖고 가라고 했다.

    내가 그 평양여자를 데리고 내 방에 온 것은 그 게 목적이었다.

    무슨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는 것은 그로써 증명된 것이 아닌가. 

    나는 무슨 마음으로 그 여자에게 그런 제의를 했을까.

    그리고 또 그 여자는 무슨 마음으로 아무런 의심없이

    그 제의를 순순이 받아들였을까.

    모를 일이다. 기억에도 없고.

     

    평양여자가 짐을 들고 일어나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를 해주고 싶었다.

    잘 가시오. 그리고 통일될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 있으시오.

    아마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후진국엘 가면 돈 쓸 일이 별로 없다.

    서 너명이 한 사흘 먹을 수 있는 체리 한 광주리에 1달러다.

    하이네켄 맥주 한병에 2달러,

    그리고 스웨덴산 압술루트 보드카 큰 거 한 병이 10달러다.

    출장비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백달러 짜리가 한 서너장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 돈도 그 평양여자에게 건넸다.

    부디 잘 가시오.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 남으시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오해 살 일을 분명히 했다.

    평양여자를 내방에 데려간 사실을 알고 있는 기자들이

    그렇게 말하면 나는 할 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주한 방의 선배기자 때문에 그런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선배기자가 내방에서 그 시간에 일어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봤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쩌다 한번 씩 그 평양여자가 생각난다.

    특히 남북 간에 긴장된 이슈가 발생하면 더 그렇다.

    그 평양여자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때 내 당부대로 어떻게든 살아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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