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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일은 감놔라, 배놔라 하고 챙기려 하면서도 막상 자기 일은 置之度外한다.
이기(利己)라는 측면의 나쁜 의미를 들이대려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한 일은 잘 모르고 넘어간다는 뜻으로 이해해달라.
술이다.
술, 지금도 많이 마시지만 잊고 산 게 있다.
군대 후배와 만났다.
옛 군 시절 얘기가 술술 나온다.
술잔을 마주하며 후배가 말 한다.
김 형, 아직도 술 마시는 게 참 신기하오.
신기하다니?
그 때 그렇게 많이 마시고 몇 번을 죽을 뻔 해놓고도 아직도 마시고 있으니.
1975년 가을 무렵이 떠올려진다.
코스모스가 만발한 청명한 가을날 일요일.
빨래하기 좋은 날이다. 빨래나 하자.
제대말년이니 빨래의 의미는 좀 각별할 것이다.
군 생활을 털어버리자. 그리고 이제 사회 나갈 참이니 좀 칼클께 보이자.
'졸병'들 모두 외출 보내놓고 오전 내내 빨래만 했다.
빨래를 끝내고 사무실로 오니 제일 신참인 덕은이가 어디서 나타나 수줍게 다가온다.
와, 할 말 있나?
예, 아무도 없는데 술이나 한 잔 하시죠.
술? 좋지.
둘이는 영농장 부근 햇빛이 따사로운 계단 위에 앉았다.
덕은이는 PX에서 가져온 경월소주 두 병과 조개맛살 안주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두 병이 네 병, 네 병이 여섯 병, 여섯 병이 여덟 병.
그리고 개구멍으로 들어오던 귀대병이 건네 준 네홉들이 소주들.
얼마나 마셨는지 모르겠다.
날이 어둑해졌을 것이다. 덕은이의 얼굴이 내 앞으로 확 다가온다.
그 걸로 모든 기억이 사라졌다.
그리고 새벽. 중대본부 교보재창고 침대에 뉘여져있었던 모양이다.
혀가 말린다. 말린 혀가 속으로 빨려 내려간다. 혀를 꺼내야 한다.
손을 입에다 넣고 혀를 빼려고 아둥바둥했던 모양이다.
죽을 만큼의 탈수증이 온 것이다. 물, 물, 오로지 물, 그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
밀폐된 교보재 창고의 창문에서 떨어져 내리고, 중대본부 창문에서 뛰어 내리고.
기어기어 수돗가로 갔더니 물이 잠겼다. 다시 취사장. 그러나 물은 없다.
사무실 뒤로 개천이 흐른다. 수량이 꽤 많은 개천이다. 결국 그리로.
그리고 눈을 뜨니 내무반이다. 무려 반나절을 의식없이 누워있었다는 것.
위생병 공 병장 왈,
정말 재수 좋다. 사진부 암실작업병이 오줌을 화장실에 누러 갔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사흘 간을 그렇게 누워 있으면서 먹은 것이라곤 '깐 포도 통조림.'
그 것밖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 얘기를 후배와 서로 기억을 맞춰가며 하는데,
그 후배가 또 묘한 표정이다.
김 형, 그 게 몇 년인가, 아마도 75년이었지요?
맞다. 1975년이다. 와 씹나?
후배는 35년 전 죽도록 마셔대던 사람과 다시 술을 앞에 놓고 있는 게
좀 거시기하고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설마 귀신은 아니겠지 하는.
35년이라는 세월이 문득 뇌리 속에 휘감겨 온다.
35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마시던 술을 지금껏 마시고 있다.
나는 무엇이고 그 술은 무엇인가.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술은 알겠다.
오래된 술이다.
나에게는 오래 된 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