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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오래 살았지만, 덕수궁을 가본지는 손에 꼽을 정도다. 얼마 전 약속 때문에 나간 시내 길에 덕수궁을 모처럼 들렀다. 약속이 어째 좀 잘못돼 광화문통을 서성거리다 덕수궁 앞을 지나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경로우대를 한다고 써 놓았길래 염치불구하고 들어가 봤다.
흐린 겨울날 오후의 고즈녁한 분위기가 좋았다. 덕수궁하면 중화전(中和殿)이나 석조전이 대표적인 건축물이라 그저 건성으로 지나치려는데, 아주 소박하게 생긴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왕궁에 지어진 건물로는 단청도 돼 있지 않고 순수한 재래식 민간 건물의 느낌을 준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석어당(昔御堂)’이라고 했다. 대충 짐작키로 무언가 임금과 관련있는 건물이려니 하고 더 읽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선조가 임진왜란의 환란을 겪은 후 최후를 맞은 집이라 했다.그러니까 선조가 난을 피해 몽진(蒙塵)을 떠나 환도 후 승하할 때까지 16년 간을 머문 곳이라는 것이다. 석어당의 昔자가 애석한 느낌을 주는 惜으로 읽혀지는 느낌이 들었다. ‘석어당’이란 당호를 붙인 것은 선조 승하 후 훨씬 후라고 하니, 옛 임금인 선조가 머물러 생을 마감한 곳이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는 설명이 있었지만...
다른 여타의 궁전 건물 처럼 화려하지 않은 이유가 선조의 환란이 녹아져있는 곳이기에 그렇게 했구나 하는 나름의 생각을 해 보았다. 순전히 내 생각이다. 엉뚱하게도 박근혜와 문재인이 생각났다. 박근혜는 탄핵으로 청와대를 쫓겨난 첫 대통령이 됐고, 문재인 또한 현재의 처지가 박근혜 못지않게 뒤숭숭하다. 문재인이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퇴임이든 임기 전 어떤 사단이 일어나든 아무튼 그가 떠난 후 청와대도 뭔가 어떤 정화의 차원에서 건물을 새롭게 좀 가꿨으면 어떨까 싶다. 나라가 하도 뒤숭숭하니 옛 임금의 이런 집 앞에서 불현듯 드는 생각이다.'볼 거 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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