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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蘭과 술
    세상사는 이야기 2021. 12. 29. 15:06

    새벽녁 잠자리에서 눈이 뜨진 건 목과 입안이 말랐기 때문이다. 엊저녁 모처럼 마신 술 탓이고, 그래서 냉장고를 몇번 왔다갔다 했다. 날이 밝기 전이라 거실은 어두웠다. 어둠에 익숙해지려 눈을 몇 차례 껌뻑이고 있었다. 그때 미명의 창밖을 배경으로 붉으스레한 그 무엇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지? 생각과 동시에 아 그렇지 蘭꽃이지 하는 자문자답이 동시에 이뤄졌다. 어둠 속에서 보는 붉은 난꽃은 뭐로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깊고 어두운 심해에서 홀로 빛을 발하는 산호초 같다는 느낌이랄까.

    꽃망울을 틔운 저 난과 입사귀가 무성한 난, 두 개의 난은 어제 친구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냥 받은 게 아니다. 친구는 술자리에 앉자마자 술값은 나더러 거의 '반강제적(?)'으로 떠밀었고 그래서 내가 술값을 냈으니, 말하자면 술값과 바꾼 난이다. 그것도 한 차례가 아니라 3차에 걸친 술값이다. 친구는 어제 약속 며칠 전부터 난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내가 난을 들고 나갈 것이다. 그러니 그리 알고 기대하고 있거라.

    친구는 소위 난 전문가다. 집에 귀한 난을 포함해 수백가지의 난을 갖고있다고 자랑한다. 그에 비해 하는 난의 ㄴ자도 모르는, 그 방면에서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문외한이다. 그러니까 그런 친구의 난을 탐(?)하기 시작한 것은 어찌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계기는 물론 있다. 친구가 자신이 키우고 있는 난을 가끔씩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다. 어쩌다 친구의 사진을 보며 이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문득 나에게도 저런 난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 같은 게 일었다. 그렇게 해서 그 친구의 난을 얻고있는 중이다. 물론 어제가 처음이 아니다. 몇 개월 전에도 네 종류의 난을 얻었다. 물론 그때에도 나는 술을 샀다.

    친구는 좀 괴짜적인 측면이 있다. 내가 보기로 술은 썩 그리 잘 마시지는 못한 것 같고 다만 무척 즐기는 편이다. 그러면서 친구의 취미 가운데 하나가 술 담그는 일이다. 그리고는 담근 그 술들을 친구들에게 나눠준다. 친구 말로는 인삼주 담근 것만 수백 병이다. 나 또한 몇병 얻어 마셨고, 아직도 그 술들이 집에 남아있다. 어제 술자리에서 내가 친구에게 물었던 게 있다. 술은 왜 그리 담그냐?

    대답이 걸작이다. 술 담그는 것과 난 키우는 게 뭔가 일맥상통한 게 있다는 것이다. 뭔 일맥상통? 그랬더니 그걸 한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다고 했다. 친구는 심각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농담을 많이 하면서 상대방의 말도 농담으로 잘 치부한다. 내가 친구더러 난 키우는 것과 술 담그는 것의 공통점이 있다면 '정성'일 것이라고 하니까 친구는 그저 눈만 껌뻑거렸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담가 놓은 독한 야관문 같은 술 몇 잔 마시고 취해 붉게 핀 난꽃을 바라보면 그리 좋을 수가 없다는 것.

    오늘 새벽녘, 작취미성 상태에서 나의 눈에 들어왔던 어둔 거실의 붉은 난꽃의 느낌이 그래서 그랬을까. 그렇다면 나와 친구와도 뭔가 일맥상통하는 게 있다는 것인가.

    아무튼 엊저녁 술에 취해 난 화분 두 개 들고 오느라 혼이 났다. 아침에 아내한테도 한 소리 들었다. 잘 키우지도 못하고 좁은 집만 어지럽히는 걸 왜 자꾸 갖고 들어오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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