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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阿火 '오봉산 호랑이'와 백모님
    추억 속으로 2020. 3. 20. 11:59

    간밤 꿈에 어렴풋하나마 어떤 분이 보였는데, 아침에 생각해보니 오래 전에 돌아가신 백모님이 아니었던가 싶다. 내 머리맡에 앉아 나를 내려다 보고 계시는 것이었는데, 백모님이 왜 보였을까가 궁금하다. 이즈음이 봄날이라서 그랬을까.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경주 아화에 있는 큰집을 자주 갔다. '큰 어무이'라고 부르던 백모님은 바지런하셨다. 어린 눈으로 보기에 잠시도 쉬지않고 사시사철 매일을 일만 하시는 것으로 보여 측은한 마음까지 들게했다.

    어느 따스한 봄날 오후였을 것이다. 큰집 마당에서 강아지와 놀고 있는데, 백모님이 화급하게 집으로 들어 오신다. 뭔가 혼비백산한 모습이다. 백모님을 따라 집으로 온 몇몇 아낙네들도 같은 모습이다. 백모님 말씀은 호랑이를 보셨다는 것이었고, 얼마나 무섭고 다급했던지 방으로까지 숨으려 하셨다.

    아화 큰집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산이 있다 오봉산이다. 봉우리가 다섯이라 붙여진 산 이름인데, 근동에서는 제일 높고 깊은 산으로 호랑이가 산다고 했다. 백모님은 봄이면 나물 뜯으러 거의 매일을 오봉산을 다니셨다. 그 날도 친구분 몇몇과 어울려 오봉산을 올랐는데, 정상 부근에서 호랑이와 조우한 것이다.

    백모님 말씀으로는 그 호랑이와 눈이 마주쳤다고 했다. 호랑이가 바위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백모님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백모님은 그 순간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손짓으로 어, 어 하고 있었고 친구분들도 바짝 언 상태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모두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 험하고 긴 산길을 한번도 쉬지않고 내쳐 동네까지 도망왔다는 것이다. 물론 나물이 담겨진 망태기는 버려 둔 채로였다.

    백모님의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은 저녁답에 건천장에 갔다오신 백부님이 오셨을때까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백부님은 그 얘기를 듣고는 "호랑이는 영물인기라" 그 딱 한 말씀과 함께 그저 흠, 흠하셨다.

    그 날 초저녁에 잠자리에 든 나는 자다가 호랑이 꿈을 꾸었다. 오봉산 호랑이가 백모님을 태우고 오봉산을 내려와 큰 집으로 들어오는 꿈이었다. 그 꿈을 꾸다말고 놀라 잠을 깨어서는 그냥 날밤으로 지새다가 새벽녘에 겨우 선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바깥의 소란스러움에 잠이 깼다. 웬일인가고 밖으로 나와보니 백부모님이 마당에 서 있고, 백모님의 친구 몇몇 분들이 아침 안개에 덮힌 오봉산을 향해 뭔가 기도 같은 걸 올리고 있었다. 백모님은 나를 보더니 손짓으로 방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나더러 나오지 말라고 하신 것으로 보아 뭔가 무슨 사단이 벌어진 게 분명한데 나는그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백모님의 말을 듣지않고 나는 그여코 마당으로 내려가 백모님 곁에 섰는데, 백모님은 나의 손을 꼭 잡으시면서 무슨 기도 같은 말씀을 하신다.

    "아이고 우리 오봉산 호랑이님, 오봉산 호랑이님, 고맙습니데이, 고맙습니데이..."

    호랑이를 봤다는 두려움과 놀라움, 신비스러움에 백모님은 잠을 잘 이룰 수가 없었다. 뒤척거리며 거의 날밤을 새는데, 한 밤 중에 울타리 대문 쪽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저벅저벅하는 발자욱 소리 같기도 하고 뭔가 끙끙거리는 신음 같기도 한 소리였다고 한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샌 백모님은 그 날 새벽에 소리가 난 울타리 대문 쪽으로 나가보았다. 울타리 벽 쪽에 뭔가 망태기 같은 물체가 네개 놓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봤더니 그것들은 맙소사! 백모님과 친구분들이 오봉산 정상에서 호랑이와 조우한 뒤 냅다 도망치면서 놔 두고 온 나물들이 담긴 망태기였다.

    그 망태기들이 다리가 있을리 없다. 분명 누군가에 의해 오봉산 정상 부근에서 큰집까지 가져다 놓지 않고서는 설명이 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럼 그 누구는 과연 누구였을까. 야심한 밤에 그 험하고 먼 산길을 달려 그 짓을 한 '누구'는 오봉산 호랑이가 아니고서야 누가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러니까 백모님이 한 밤 중에 울타리 대문 쪽에서 들었다는 그 소리는 호랑이가 망태기를 내려놓고 가는 기척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일이 있고난 후 백모님은 그 얼마 간 넋이 좀 나간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시도 때도 없이 오봉산을 바라보며 오봉산 호랑이를 기렸다고 한다. 백부님도 백모님 곁에서 맞장구를 쳐셨다. "호랑이는 영물인기라..."

    이 봄날, 백모님은 아마도 나에게 그 옛적 오봉산 호랑이 얘기를 다시 들려주시려 꿈에 나타난 것으로 나는 믿고 싶다.

    (사진은 2011년 3월 백부님을 실은 상여 나가는 모습입니다. 오른 편의 산줄기가 오봉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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