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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북한사람들사람 2022. 4. 4. 15:08
(1)
초짜기자 시절인 1978년 경인가, 북한사람 몇을 처음 대해 봤다. 오리섭(吳利燮)이라는 북한의 어부. 어로작업을 하다 사고로 남한해역으로 넘어 와 우리 측에 의해 구조 당한 사람이다. 이 사람 말고 다른 어부들도 몇 명 더 있었다. 그 당시는 남북한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체제 경쟁이 치열했다. 남이든 북이든 ‘귀순’을 반겼다. 귀순 자체가 체제 우월의 바로미터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리섭 씨는 귀순을 택했다. 그 과정에서 이 분을 만나 취재를 했다. 정보당국에 의한 세뇌가 없을 수 없었기에 그로부터 속내나 어떤 진정성있는 얘기는 들을 수 없었다. 자리가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반전이 일어난 건 사탕 한 알 때문이다. 그와 마주앉은 테이블 위에 차와 함께 알사탕같은 캔디 과자가 놓여있었다. 분위기를 돌려보려 내가 그 캔디를 그에게 권했다. 그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캔디를 받았다. 그러고는 포장지를 까고 입에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그가 갑자기 흐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북에 두고 온 어린 자식 이름이었다. 과자를 보자 북에 있는 아이들 생각이 났던 것이다. 그때부터 갑자기 그가 김일성을 욕하기 시작했다. 아이들한테 과자 하나도 잘 먹이지 못하는 놈이라고 욕했다. 내가 그를 다독거려주었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비로소 그의 속마음이 열렸던 것인가. 이미 귀순 결정을 한 오 씨였지만, 그의 남한사람들을 보는 눈은 일거수일투족이 경계심이 가득했고 비협조적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사람이 완전 달라졌다. 취재는 성공적이었다.
오리섭 씨 말고 다른 어부들에 대한 귀순 설득도 꾸준히 진행됐다. 그러는 과정에서 단 한 명을 빼고 대부분이 귀순하기로 했다. 그 단 한 명은 집요하게 북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가겠다면 돌려보내야 한다. 하지만 정보당국의 설득도 또한 집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근무처 조정관으로 잘 알고지내던 정보당국 직원이 나에게 좀 만나자고 했다. 그 어부 귀순 설득 작업을 도와달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다른 거 없다. 그저 만나 밥이나 함께 먹으면서 이야기나 나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접근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면서 그런 분위기에서 귀순을 종용해 보라는 것이었다. 짜여진 각본은 없다고 했다.
만났다. 조정관도 함께 했다. 이문동에서 저녁을 먹다가 술판으로 이어졌다. 그 어부는 스무살 초반의 앳된 청년이었다. 내가 그와 무슨 얘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조정관과 세상살이 등에 관해 나누는 얘기가 더 많았다. 정부도 욕하고 박정희 대통령도 비판하고 하는. 북한의 그 청년어부는 우리들 얘기를 아주 재미있어 하며 듣는 듯 했다.
소주 병이 늘어나면서 다들 취해갔다. 북한의 그 청년어부도 벌개졌다. 밤 9시가 넘어 술집에서 나왔다. ‘소기의 목적’도 못 이루었는데, 이제 어떡해야 하나.
헤어지자며 인사를 나누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떠 올랐다. 술김에 장난 한번 쳐 보자는 것. 청년어부에게 물었다. 한국 와서 지하철 타본 적이 있는가. 정보당국 직원과 타본 적이 있다고 했다. 조정관의 표정을 살피며 내가 이런 제의를 했다. 그러면 오늘 혼자서 지하철을 타 볼 생각은 없는가. 조정관이 눈치를 보낸다. 그에 구애받지 않고 나는 말했다.
다 짜여진대로 하는 것, 다 짜여진 것만 보는 것, 그런 거 백번 해도 필요없다. 지하철을 혼자 타고 가면서 남한사람들 틈에 끼어 보라. 그러면 한국이 어떤 나라라는 걸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답답한 김에 정말 농담삼아 불쑥 꺼내 본 제의였다. 그런데 그게 거짓말처럼 받아들여 졌다. 술들이 취해있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조바심을 내는 조정관에게는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호기도 부렸다.
이렇게 하기로 했다. 이문 전철역에서 그 어부를 혼자 태운다. 그리고 서울역에서 내리게 한다. 그 전에 나와 조정관은 택시를 타고 먼저 서울역에 가 기다리겠다. 조바심이 없진 않았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했고, 서울역에서 우리들은 별 탈없이 만났다.
그 며칠 후 북한의 그 청년어부는 귀순 의사를 밝혔다. 그의 그런 심경의 변화에 따른 귀순 발표를 언론보도로 접했는데, 그 속내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다만 그 보도를 보고 듣는 순간 뭔가 강한 짜릿함이 느껴졌다.
(2)
당부사항이 있었다. 호텔 20층엔 올라가지 마라. 그러나 우리는 그 것을 무시했다. 오랜 비행 끝에 도착한 타시켄트는 말 그대로 찜통 그 자체였다. 비행기에서 내리려는데, 좀 아는 여 승무원이 비닐봉지에 뭔가를 싸준다. 술이다. 조그만 병의 와인들. 그 가운데 비행기 안에서 마시다 남은 위스키가 한 병쯤 있었다. 그 술을 방송기자인 후배와 호텔 방을 잡고 각자 기사를 송고하고 난 후 나눠 마셨다. 이열치열이라든가. 너무 더워서 마셨을 것이다. 술기가 올랐다. 취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뻗쳤다. 호텔20층, 가지 말라던 곳 아닌가. 반바지 차림으로 20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끝에 무슨 네온사인이 번쩍거린다. 한글로 뭐라고 써놓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豪氣와 호기심 반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끌벅적한 실내. 그러나 어두컴컴해 잘 안 보인다. 노래가 흘러 나온다. 귀에 익은 노래다. 현철의 노래. 사랑은 얄미운 나-빈가봐 하는. 그곳은 북한이 운영하는 술집이었다. 한국관리와 기자들이 타시켄트에 온다니까 정략적으로 급조해 놓은 술집, 그런 술집이란 게 한 눈에 들어왔다.
어둠이 눈에 익어지니 테이블이 드러난다. 올망졸망 앉아있는 면면들을보니 안면들이 있다. 우리 기자들이었다. 테이블을 하나 차지해 앉았다. 여자가 한 명 앉는다. 어디서 왔느냐? 평양이에요. 평양? 예, 평양이에요. 갸름한 얼굴이다. 엷은 화장을 했는데, 나이가 좀 들어보인다. 맥주를 시켰더니 하이네켄이 나온다. 하이네켄 4병에 마른 안주 하나. 후배, 그리고 그 평양여자와 나눠 마셨다. 무슨 얘기들을 주고 받았던 것 같은데, 취기가 많이 올랐던지 기억에없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계산서를 달라고 했다. 쌌다. 모두 합해 12달러. 백달러짜리를 꺼내 계산을 하고 나머지 돈을 받았다. 그 돈을 평양여자에게 모두 팁으로 줬다. 그 전에 물어 본 말이 있다. 여기서 근무하면 한 달에 얼마를 받느냐? 20달러라고 했다. 4개월어치 이상의 돈을 그 평양여자에게 팁으로 준 것이다.
호텔의 내 방 맞은 편에 잘 아는 선배기자가 있었다. 더운 날씨에 냉방도 엉망이라 모두들 방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시간은 야심해 가는데, 나는 아직까지 방에 들어오고 있지 않다. 이 친구는 어디를 갔을까. 그 무렵 복도가 저벅거린다. 선배가 복도 쪽을 바라다보니 내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니다. 뒤에 어떤 여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저 친구, 오늘사고낼 게 분명하다. 여기서 그 짓하다가는 자칫 골로가는 수가 있다는데, 어찌하나. 선배기자는 내가 내심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후에 듣기로 그 선배는 여차하면 말릴 작정이라고 했다. 방문이 활짝 열려져있지 않은가. 그러니 방에서 무슨 짓 하는 게 다 보일 것이라 그 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그 여자는 20층, 북한술집에 있는 그 평양여자였다.
나는 우선 그 여자를 편안하게 앉혔다. 그리고 달랬다. 긴장하지 마라. 그 말에 그 여자는 더 긴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그 여자는 어떻게 해서 나를 따라 내 방에 오게된 것일까. 분명 내가 뭔가 ‘미끼’를 던졌을 것이고, 그여자는 그 것에 이끌렸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많은 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가 나를 따라 온 것은 대단한 배짱이 아닌가 싶다. 여자를 앉혀놓고 나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큰 가방이나 쇼핑백, 아니면 대형 비닐봉투가 필요했다. 뭔가를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당국은 서울을 출발하기전 우리들에게 댱부를 했다. 먹을 것을 준비하라는 것. 그리고 모기약과 해충약, 그리고 상비약 등도 챙기라고 했다. 먹을 것이 마땅치 않을 것이고, 여러가지 위생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남대문시장엘 가서 이것 저것 등을 준비했다. C-레이션과 통조림, 라면, 각종 반찬통조림 등도 챙겼다. 그 것들이 내 방 냉장고 속에 그대로 들어있었다. 그런데 막상 타시켄트에 도착한 후 그 것들이 필요가 없어졌다. 우리 국적항공사에서 상황을 보고 조치를 취한 것인데, 현지에 간이식당을 만들어 식사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호텔 냉장고는 거짓말 좀 보태 집채 만 했다. 게다가 붕붕대는 소음은 또 얼마나 크던지 잠을 이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육중한 냉장고문을 열고는 서울서 가져 간 모든 것들을 꺼내 모기장에다 담기 시작했다. 있는 것을 하나도 남기지않고 몽땅 담았다. 모기장에 싸여진 짐은 꽤 크고 부피가 나갔다. 평양여자더러 그 것을 갖고 올라가라고 했다. 내가 그 평양여자를 데리고 내 방에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게 목적이었다. 무슨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나는 무슨 마음으로 그 여자에게 그런 제의를 하고 데려왔을까. 그리고 또 그 여자는 무슨 마음으로 아무런 의심없이 따라왔을까. 그와 관련해 딱히 집혀지는 기억은 없다. 평양여자가 짐을 들고 일어나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를 해주고 싶었다. 잘 가시오. 그리고 통일될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 있으시오. 아마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싶다. 그 여자도 나에게 분명 무슨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에 없다. 그 말을 기억에 담아 새겨두고 말 감정의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후진국에 출장을 가면 돈 쓸 일이 별로 없다. 타시켄트도 그랬다. 그 무렵 서너 명이 한 사흘 먹을 수 있는 체리 한 광주리가 1달러다. 하이네켄맥주 한 병에 1 달러도 안 됐고, 스웨덴산 압술루트 보드카 큰 거 한 병이 10 달러였다. 출장비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백 달러짜리가 한 서너장 남아 있었을 것이다.그 돈도 그 평양여자에게 건넸다. 부디 잘가시오.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 남으시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리 술김이라도 간 큰 짓을 했다. 오해 살 일도 분명히 했다. 평양여자를 내 방에 데려간 사실을 알고있는 기자들이 어떤 식으로 옭아매도 나는 할 말이 없었을것이다. 또 기자단과 당국에서 나에게 어떤 조치를 내린다 해도 달게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주 한 방의 선배기자 때문에 최소한 그런 오해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선배기자가 내 방에서 그 시간에 일어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봤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다.
지금도 어쩌다 한 번씩 그 평양여자가 생각난다. 북한 내부가 좀 시끄럽고 남북 간에 긴장된 이슈가 발생하면 그렇고, 종편 방송의 북한관련 프로에 나오는 자유를 찾은 탈북 여성들을 볼 때도 그렇다. 그 평양여자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여 탈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됐든 그 때 내 당부대로 살아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어떻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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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권 퇴진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새삼 문 정권이 얼마나 기만적이고 속이 텅빈 정권이었나를 절감케 한다. 정치, 경제, 외교 등 모든 부분에서 도대체 이 정권이 5년 동안 한 게 뭐가 있을까고 돌이켜보면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0'다. 아니 오히려 그나마 있는 걸 조목조목 까먹은 마이너스 정권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대다수 국민들로 하여금 참담감을 갖게할 정도다. 남북관계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 정권이 바뀌었으니, 5년 동안의 문재인 정권의 남북관계와 관련한 정책에 대한 엄혹한 평가가 우선적으로 이뤄져야할 것이지만, 문재인이 남북한 간의 평화와 공존을 핑계로 요란을 떨었던 이른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얼마나 거짓되고 조잡한 것이었나 하는 건 얼마 전 북한 김정은의 그 역시 기만적인 ICBM 시험발사로 증명이 됐다. 돌이켜보면 문재인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의 5년을 이른바 위장평화에 기반해 김정은의 꼭둑각시 노릇을 하면서 보낸 것이나 다름없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국민들도 문재인과 김정은의 '위장평화 쇼'에 철저히 농락당한 것이다.
정권교체가 되면서 남북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겠지만, 문재인정권 전으로 되돌아갔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어두운 관측의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 판을 새로 짠다는 점에서 남북이 서로들 진정성으로 머리를 맞댄다면 좋은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는 어떤 기대감도 갖게한다. 그러니 실망해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 아무래도 사람이 중요하다. 윤석열 대통령당선자도 그렇고,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도 그에 버금가게 그렇다. 사람이 하는 것이니, 남북관계도 결국은 사람을 통해 모든 일이 이뤄질 것이다. 이제껏 대결 및 어설픈 평화구도 속에서 적대적 혹은 파트너로서의 경험적인 축적도 많다. 이 과정에서 서로들의 주장이 맞서고 엇갈려온 게 남북관계의 현 주소다. 많이 속이고 많이 속고들 그랬다. 그게 80년의 세월이다.
80년이면 한 세기다. 거의 한 세기를 그런 식으로 지내왔다면 한 세기의 마감을 목전에 두고서는 서로 바뀌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사람이 하는 짓이니 사람이 문제일 것이고 사람이 알아서 해야할 일이다. 말 그대로 서로의 善意속에 그 답이 있을 것이니 그것으로 풀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선의는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가. 윤석열당선자는 국민을,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은 인민을 진정으로 생각하면 될 일이다.
개인적으로 지금껏 살아오면서 남북관계에 관심을 많이 가져왔다. 그와 관계되는 직업도 가져봤다. 북한사람들도 더러 만나봤다. 내가 만나 본 북한사람들의 면면은 기억 속에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다. 아무리 체제가 거칠고 엄혹해도 선의에 바탕한 본성은 살아있다는 걸 확신시켜 준 사람들이었기에 그렇다.
문재인 정권은 대한민국 역사를 부정하는 언행을 5년 동안 일삼았다. 가증스러운 짓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과거 정권과 그 시대에 대해 욕과 비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아무리 엄중한 유신군사 정권이었던 박정희 시대라 해도 남북문제에 있어 문재인 정권처럼 기만적이고 몰상식하지는 않았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 시절 만났던 북한사람들에 대한 경험, 그리고 느낌을 적어 보았다.'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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