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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잡는다. 어디를 함께 가면서 거기에 닿아면서다. 수고했다. 고맙다. 서로를 다독거렸다. 희고 부드러운 손이다. 따뜻한 손이다. 마주잡은 손이 떨어지고 있을 때 좀 생경한 느낌이 왔다. 문득 친구의 손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거기까지다. 그리고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디를 함께 가고 있었는지, 무엇을 하러 거기에 갔었는지, 그 스토리가 분명 있는데 도무지 떠 오르지가 않는다. 다다른 곳의 어렴풋한 모습은 아른거린다. 그러나 모르겠다. 뚜렷한 건 친구의 하얀 손, 머리가 벗겨진 하얀 얼굴, 그리고 희미한 미소.
눈을 뜨니 아직도 어둠에 잠긴 새벽이다. 그러니까 그 꿈 때문에 잠을 깬 것이다. 친구가 꿈에 아른거린 것이 신기했다. 왜 꿈에 나타났을까, 그리고 그게 어떤 꿈이었지 하는 궁리로 이부자리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떠 올리려 애를 써 봐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블랙아웃이고 딱 거기까지 만이다. 하얀 손, 하얀 얼굴, 희미한 미소.
그러다 문득 마음 한 구석에서 치밀어 오르는 슬픔이 있었다. 친구의 生死에 관한 구분이 일면서다. 친구는 죽었다는 사실, 그게 머리를 강하게 때리며 다가온 것이다. 근데 그 친구가 꿈에 나타난 것이다. 삶과 죽음의 그 순간적인 구분, 그러니까 그 친구가 죽었다는 인식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이부자리 속에서 울었다. 멀리 어디선가 새벽 닭이 울고 있었다.
언젠가 불현듯 생각 날 것이지만, 꿈 속에서 친구와 함께 가던 곳은 아마도 산이었을 것이다. 친구는 산을 참 좋아했다. 내가 친구를 산으로 이끌었다. 1980년대 중반 겨울인가, 친구를 처음 산으로 데려간 곳이 치악산 비로봉이었다. 친구로서는 높은 산, 그기에다 겨울 산은 처음이었다. 눈 덮인 비로봉 돌탑을 배경으로 몇 장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크게 확대해 뽑아 줬다. 그 몇 사진은 그 후 수년 간 친구 집의 거실에 걸려있었다.
수십 년을 함께 산을 다녔다. 북한산 등 서울 인근의 산을 비롯해 전국의 산들을 많이 다녔다. 친구와의 마지막 원행 산행은 재작년 11월의 지리산 종주다. 중산리에서 올라 대원계곡으로 하산하는 3박4일의 산행이었다. 새벽 장터목, 그리고 단풍으로 물든 아침 천왕봉 길에 해맑게 웃던 친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때 우리들은 어떻게 감히 죽음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친구가 간지 한 달이 다 돼 간다. 친구는 지금쯤 그 세계의 어느 지점에 이르는 길을 홀로 가고 있을 것이다. 그 길을 일컬어 나는 '보보일체 생독로(步步一體 生獨路)'라 했다. 걸음 걸음이 몸 하나 되어 살은 듯 홀로 가는 길. 친구의 49齋가 얼마 남지 않았다. 친구는 그 홀로 가는 길에 꿈에서나마 나에게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슬프다. 슬프다. 친구여 갈 가라.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어느 해 가을, 지리산 산행길에서의 친구 내외의 모습(오른 쪽). 가운데는 석태 형. 친구 죽고나서 이 사진을 석태 형에게 보냈더니 "눈물이 난다"고 했다. 나는 "울지 마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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