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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기억의 저 편사람 2019. 5. 23. 19:42
3년 전에 쓴 책의 내용에 대해 어떤 분으로부터 '항의'을 받았다. 격렬한 항의였다. 책은 고향에 관한 것으로, 해방 전후와 1950, 60년대 고향의 지역 역사를 다룬 책이다. 항의를 한 분은 그 책의 한 챕터의 주제가 되는 어떤 분의 인척이다. 항의의 요지는 이렇다. 내가 쓴 그 글로 인해 집안이 과장을 좀 보태 거의 풍비박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통화가 시작되면서 거의 흥분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얘기를 하기에 대화가 되지않을 정도였다. 나는 한 동안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인척 분의 얘기는 집안이 그 책으로 인해 수습이 안 될 정도이니 그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투였고, 조용하던 집안을 그렇게 들쑤셔 놓은 이유가 뭐냐고 강하게 따졌다.
나는 그 인척 분의 얘기가 끝날 때까지 들으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상대방에게서 조금 숨을 고르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기에,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나도 말을 해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이런 말을 했다. 영욕으로 점철된 그 분의 인생역정을 결코 비난하거나 부정적인 관점에서 쓴 것이 아니라는 것. 한 때나마 경도됐던 이념의 굴레 때문에 영과 욕, 그리고 고난과 역경의 시대를 살아 간 그 분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들이고 싶었다는 것. 그 분의 발자취 자체가 지역 역사의 한 부분인 만큼 그 기술(記述)에서 결코 제외될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이념과 별도로 지역 사회에서 그 분이 음악과 미술 등 문화 발전에 끼친 공로를 재평가하고 싶었다는 것. 한 마디 덧붙였다. 글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그리고 사실적 확인을 위해 그 분의 친.인척 누구 단 한 사람이라도 찾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찾아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언젠가 이런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통화로나따나 만나 봬 정말 반갑다는 것.
나는 사실 그 분의 얘기를 쓰면서 애를 먹었다. 자료가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기댈 수 있었던 것은 그 분과의 일년 여 남짓한 인연이다. 내가 그 분을 알게 된 건, 1970년대 중반 그 분이 몸담고 있던 그 지역의 한 신문사에 견습기자로 들어가 한 6개월 간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 신문사를 나와서도 한 동안 그 분과 편지도 주고 받으면서 만나기도 했다. 당시 그 분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이 있었고, 또한 그 분은 인생 선배로서의 강렬한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 분에 관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항상 갖고 있었다. 문제는 자료와 증언인데, 그게 거의 전무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 분에 대한 글의 미진함을 항상 갖고있던 터였다.
나이 지긋한 그 인척의 입장은 이런 것이다. 그 시대를 그 분과 함께 단지 인척이라는 이유로 알고 지내며 겪은 처지, 이를테면 옥바라지를 하고 고문 등의 고초를 당한 그 자체로도 자신은 물론 그 가족들에게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래서 그 분의 흔적을 집안에서 거의 지워 버렸다. 그랬기에 그 분의 이런 저런 아래 후손들은 그 분에 관해 모른다. 그런데, 내가 쓴 그 책으로 그게 드러났고, 그래서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 왜 이제 다 정리되고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몰라도 될 일을 이제 와서 다시금 그 책으로 떠 올리게 하느냐. 나는 그 인척 분을 충분히 이해한다. 연좌제가 사라졌다지만 그 어두운 유산은 아직도 남아 서성대고 있는 것이다.
평행선으로 치닫을 것 같던 얘기가 그 분에 관한 이런 저런 얘기 쪽으로 흘러가면서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그 인척 분은 그 분에 관해 이런 얘기를 했다. 참 인물좋고 인성좋고 똑똑한 양반이었지요. 세상을 잘못 만난 탓이지예. 이후 그 인척 분과의 얘기는 그 분을 추억하는 쪽으로 서서이 흘라갔다. 급기야 얘기들 속에 서로 간에 눈물도 묻어 나왔다. 얘기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화로 할 얘기들이 아니었다. 나로서는 아직도 그 분에 관해 못 쓴 게 너무 많다. 맨 땅에 헤딩하듯 파고들었던 그 분에 관해, 그 인척 분은 나에게는 말하자면 거의 '생자료'와 같은 존재다. 만나고 싶다고 했다. 다짜고짜로 그런 의사를 전했을 것이다. 그 인척 분도 그런 심사(心思)가 있는 듯 했다. 그 심사 속에는 그 분에 관한, 내가 처음 들어보는 그런 얘기들이 담겨져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서울에서 금명 간 만나기로 했다. 뭔가 기억의 저 편 한 쪽이 어둠 속에서 서서이 밝아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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