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馬山 옛 극장들의 추억추억 속으로 2019. 6. 29. 07:37
개인적으로 영화라는 것을 제일 처음 대하고 본 게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1950년대 중. 후반이었던 것 같다. 창동에 있던 시민극장이었고, 영화는 ‘논개’로 어렴풋이 기억된다. 1956년 윤봉춘 감독이 만든 ‘논개’가 있었다고 나와 있는데, 아마도 그 영화일 것이다. 남성동 동무 집의 누나가 나를 데리고 갔는데, 그 누나의 치마 밑에 숨어 극장에 들어간 기억이 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입장료 아끼려고 그랬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 영화에서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물에 투신했을 때 수중촬영인지는 모르겠으되, 물속에서 물방울이 몽금몽금 피어오르는 장면이 머리 속에 한참을 따라다녔던 기억이 있다. 논개 역의 주인공이 도금봉이라 생각했는데, 김삼화였다. 지금에서 찾아보니 김삼화와 도금봉이 많이 닮았다. 외국영화를 처음 본 곳도 시민극장이다. ‘페이튼 플레이스(Peyton Place)'라는 영화였는데, 당시 대학에 다니던 외사촌 형이 데려가 주었다. 그 영화 상영기록을 보니 1960년이니 국민학교 3학년 때다.
외국영화로 특별히 기억나는 영화가 3.15극장에서 상영된 ’오케스트라의 소녀‘인데, 중학교 갓입학했을 때다. 용돈이 궁할 때라 당연히 영화 볼 돈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의 묘수가 당시말로 ’떨구치기‘라는, 검표원의 눈을 피해 몰래 입장하는 방법이었는데, 그 짓을 하다 잡힌 것이다. 망신살 뻗히는 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3.15회관이 개관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복도바닥에 껌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을 유리조각으로 떼어내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오고가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그 짓을 하는데, 누군가가등을 친다. 서성동 시외버스 주차장의 아버지 사무실에 있는 직원이었다. 아버지에게 이르지 말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 일을 열심히 했더니 영화를 보게 했다. 그래서 그 영화를 잊지 못한다. 특히 영화의 피날레, 지휘자로 분한 프란체스카티가 소녀의 연주에 감동해 서서히 지휘에 몰입해가는 그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뚜렷하다.
예전에 본 영화들은 저마다들 추억을 낳게 한다. 영화를 틀어주는 곳이 극장이니, 극장도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산실이다. 마산은 1970년대까지 영화의 도시라 불릴 만큼 극장들이 많았다. 시민극장. 중앙극장. 강남극장. 3.15회관. 마산극장. 제일극장. 동보극장. 태양극장 등 수 많은 발길로 성시를 이루며 그 시대를 풍미했던 옛 극장들은 이제 마산이라는 지명이 사라진 것처럼 다들 사라져버렸고, 극장 주변에서 극장과 함께 번성을 구가할 수 있었던 창동 등 마산의 상권도 쪼그라들고 있는 상태라 안타깝다.
마산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때 그 시절 영화와 극장을 기억하고 추억할 것이다. 구마산에 살았다면 시민극장과 강남극장. 동보극장이 떠오를 것이고, 신마산이라면 마산극장과 제일극장, 그리고 그 중간쯤이면 3.15회관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릴 적 남성동에 살아서인지 시민극장을 제일 많이 다녔다.
(월초 정진업 시인이 1930년대 초, 시민극장에서 내레이터 아르바이트를 한 것으로 회상하고 있는 한하균 선생 -경남도민일보 2000년 12월 13일자)
시민극장하면 떠올려지는 인물이 그 극장 주인이었던 박세봉이다. 해방이 되면서 1946년 극장을 인수해 시민극장으로 이름으로 문을 연 분이 박세봉이다. 어릴 적 시민극장에서 그 분을많이 봤는데, 어른들의 얘기로는 그 분이 일제시대 그 극장에서 서기로 일했다고 했다. 시민극장 자리의 역사는 깊다. 시민극장으로 새로 문을 열기 전 그곳은 일본인 본전(本田)이 운영하던 ‘공락관’이라는 극장이었고, 그 전에는 ‘마산구락부’가, 또 그 전에는 ‘마산민의소’가 있었다. 조각가 문신 선생이 이 열 살 즈음의 어린 나이로 이 극장에서 간판그림을 그렸고, 월초 정진업 시인이 마산상고를 다니던 1930년대 초 이 극장에서 내레이터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마산의 도심인 창동에 있던 시민극장은 개관 초부터 성황이었다. 극장 주인이었던 박세봉은 그래서 많은 돈을 벌었고, 마산의 개봉관으로서의 극장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많은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1953년에는 대형스크린을 설치해 세계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인, 리처드 버튼, 빅타 마추어 주연의 ‘성의(聖衣)’를 상영해 공전의 히트를 치기도 했다. 시민극장은 1960년대 학생들 단체관람의 요람이기도 했다. 사극(史劇) 단체관람을 주로 했는데, 중학교를 다닐 어느 해인가, 김진규와 김지미가 주연한 ‘정동대감’ 단체관람을 하다, 피날레쯤일 것이다. 역적으로 몰린 조광조로 분한 김진규가 다시 구제될듯하다 사약을 마시는 장면에서 극장이 박수와 울음바다의 도가니가 되던 기억이 난다.
시민극장은 한 때 마산의 창동과 오동동. 부림동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마산의 중심상권을 호황으로 이끌던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시민극장은 마산의 다른 주요 극장들과 마찬가지로 복합상영관인 멀티플렉스가 대세를 이루면서 1995년 7월27일 문을 닫는다. 마지막으로 상영 된 영화는 멜 깁슨 주연의 ‘브레이브 하트’였다.
(1976년 3월의 어느 날, 시민극장의 상영영화는 고영남 감독의 '왕룡'이었다)
부림동 시장 안에 있던 강남극장은 그 전 부림극장이라는 이름으로 1945년 광복이후 마산에 생겨난 신설극장이다. 당시 건설회사를 경영하던 이옥도가 1947년 8월 부림극장으로 개관을 했고, 이어 국제극장, 강남극장 순으로 이름이 바뀐다. 강남극장은 지어질 당시 철근이 귀한 시절이었는데, 철근 대신 철도레일을 사용해 건축된 철골조 건물로,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모습의 건물이었다.
건물 자체도 그렇지만, 강남극장은 건설당시 좌석 852석, 입석 530석으로 총 1,282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마산의 최대 영화관으로 주목을 끌었다. 이런 관계로 강남극장은 1970년대부터 영화상영 외에 무용발표회, 미스경남 선발대회, 김대중 전 대통령 시국연설발표회 등 각종 공연과 행사가 치러지는 장소로도 유명세를 탔다.
마산에서 제일 큰 극장다운 개봉관으로, 강남극장은 지금으로 치면 블록버스트 급의 영화를 일찍부터 많이 상영했다. 옛 강남극장에서 상영된 영화로, 그 시절 마산사람들에 추억되고 있는 영화는 1962년 겨울의 ‘십계’가 아닐까 싶다. 그 시절로서는 획기적인 70밀리(mm) 시네마스코프 화면에 4시간 이상의 러닝 타임을 가진 영화였는데, 거대한 화면과 사운드에 마산 시내가 압도됐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일반인들 대상으로 한 상영이 끝나면 다음 차례가 학생단체관람이다.
당시 ‘십계’를 보려고 추운 겨울새벽 5시쯤인가 어두운 양키시장을 세로로 질러 강남극장 앞에서 모여들 서서 기대감에 웅성거리던 단체관람의 그 때가 생각난다. 강남극장도 1990년대 들어 결국 멀티플렉스의 힘에 밀린다. 2000년 12-13억 원을 들여 대대적인 시설개선 등으로 맞섰지만 역부족, 결국 2008년 폐관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철거 당시 강남극장의 초라한 입구 모습)
추산동 19번지에 있던 중앙극장은, 원래 옥포양조장이 있던 자리에 지어져 1957년 개관됐는데, 문을 열 당시 이름은 ‘자유뉴스관’으로, 자유극장으로 불렸다. 1960년 3.15의거 당시에는‘자유뉴스관’이라는, ‘자유’가 들어간 극장이름이 자유당과 관련이 있다하여 성난 데모대가 돌을 던지고 난입해 전 직원이 옥상으로 피신했다는 에피소드를 가진 영화관이다.
이 때문인지 ‘자유뉴스관’은 1961년 7월 중앙극장으로 이름을 바꾼다. 마산 영화역사의 산증인인 이승기에 따르면 당시 극장 신문광고에는 7월6일까지 자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최무룡과 최은희가 나오는 ‘군도(群盜)’라는 영화 상영을 알리고 있었으나, 닷새 후인 11일, 개명된 중앙극장으로 영화를 광고하고 있다. 그 때 영화가 아란 랏드와 돈 마레 주연의 ‘비정의 대서부’였다고 한다.
중앙극장은 영화와 함께 그 시절 유행하던 쇼 공연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마도 무대가 넓고 깊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예술 공연도 많이 이뤄졌는데, 1964년 극단 ‘신협’이 세익스피어 탄생400주년을 맞아 그 기념작으로 ‘오셀로’를 마련, 김동원. 이해랑. 오현주 등 당시의 스타급 연기장들의 연기로 공연돼 큰 성황을 이뤘다는 기록이 전한다. 집이 추산동에 있었던 중학교에 다닐 무렵, 중앙극장 영화를 많이 보러 다녔는데, 어느 해 가을, 최무룡이 주연하고 주제곡도 불렀던 흑백의 ‘외나무다리’를 보고 처연한 심정으로 추산동 어둔 거리를 걸어집으로 걸어 내려가던 추억이 깃든 극장이다. 중앙극장도 2003년의 마지막 날인 12월31 ‘반지의 제왕’ 3편을 끝으로 문을 닫았으며, 지금은 중앙가구사가 들어서 있다.
신마산에 있는 마산극장과 제일극장은 1910년대 일제강점기 때부터 각각 ‘마산좌’ ‘앵관’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역사가 깊은 영화관이다. 해방 후 언제 ‘앵관’이 제일극장이란 영화관으로 개관됐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이승기는 1955년에 제일극장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봤다고 한다. 개관초기에는 외국영화를 주로 상영했으나, 이후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는 한국영화가 많이 상영됐다.
한 기록에 의하면 1959년 황해 주연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반공영화와 도금봉. 한은진이 나오는 ‘유관순’, 그리고 김지미. 최무룡이 나오는 ‘청춘극장’ 등이 제일극장에서 상영됐다. 제일극장이 문을 닫은 시기와 관련해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극장연감’에 따르면 1965년에는 제일극장이 있었고, 1977년에는 없는 것으로 미루어 이 기간 중에 폐관된 게 아닌가하는 게 이승기의 얘기다.
마산극장은 1914년 ‘마산좌’로 개관 후 해방 후에도 ‘마산’이란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마산극장의 주인은 이재봉과 정노금 양인으로, 이 가운데 이재봉은 마산의 저항시인인 故이선관의 부친이다. 마산극장으로 간판을 단 이래로 많은 영화와 연극, 쇼, 그리고 노래자랑대회 등 각종 공연이 열려 추억이 깃든 영화관이다. 故추송웅의 ‘빨간 피이터의 고백’이 전국순회를 하면서 마산극장에서 공연해 많은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문을 닫은 시기는 1980년 이후로 전해지는데, 그 자리에는 대형 가구점이 들어섰다가 그 후 대형빌딩이 신축되면서 마산극장은 자취를 감추었다.
(마산극장의 옛 모습)
동보극장은 1958년 옛 고려모직 공장자리에서 개관한 재개봉관 극장이었다. 창고스타일과 공원벤치형 좌석으로 1960년대 체리보이 등이 출연하는, 좀 저렴한 쇼 공연이 많이 있었던 극장이다. 영화 값도 싸 시민극장이나 강남극장 등 개봉관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로 다니던영화관으로, 1970년대 초 폐관되면서 그 자리에 나이트클럽이 들어섰다.
3.15회관은 마산의 3.15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마산시민의 성금과 마산시의 보조, 그리고 당시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하사금으로 1962년 9월20일 개관된 3.15기념관이 그 모태다. 개관 1년 후인 1963년 4월 영화전용상영관으로 바뀌면서 3.15회관으로 개명되었는데, 운영을 맡았던 ‘3.15유족회’의 수익성 제고를 위한 조치였다. 이후 유족회에서 수년간 운영하다 회원들 간의 불협화음으로 민간에게 대여된 후 2005년까지 많은 영화와 공연이 있었다.
3.15회관의 초대상영작은 스티브 리브스 주연의 ‘백마 하지무라드’였고, 이어 율브리너와 토니커티스 주연의 ‘대장 불리바’ 등이 개봉작으로 이어져 성황을 이뤘다. ’2005년 4월6일 건물자체가 철거되면서 3.15회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마산노인종합복지관’이 들어서있다. 3.15의거를 기리고 추모하는 기념하는 사업과 각종 공연은 양덕에 새로 건립된 ‘3.15아트센터‘로 이관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로부터 3.15회관, 태양극장, 마산극장, 중앙극장, 연흥극장)
'추억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옛 동아방송(DBS)의 '밤의 플랫폼' (0) 2019.08.08 인현시장 골목 (0) 2019.07.02 한 여름, 어떤 도식(盜食)의 추억 (0) 2019.06.28 '인생극장'에서 짚어보는 파주 광탄 땅의 옛 추억 (0) 2019.06.21 마산港 뱃머리의 옛 여객선들 (0) 2019.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