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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자꾸 어두워진다. 술이 좀 과도해졌다하면 그게 촉매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 고등학교 카페에 시를 쓰는 동기가 백석 시인에 관한 글을 올렸다.
그 글을 보니 아차, 생각이 났다. 백석의 흰 당나귀를 보러 거기를 갔었지 하는 기억.
지난 주 금요일, 광화문에서 후배들이랑 낮술을 곁들인 점심을 먹고는
한 후배를 꼬드겨 간 곳이 서촌 누하동의 '백석, 흰 당나귀'라는 곳이다.
페이스북에 좋은 글을 쓰고 계시는 박미산 시인이 주인장으로 있는 곳이다.
낮술에 취해서였을 것이다. 호기롭게 압술루트 보드카 한 병을 시켜 후배랑 둘이서 마셨다.
그 기억이 오늘 아침 친구의 백석 시인에 관한 글을 보고 비로소 생각난 것이다.
박 시인과 몇마디를 주고받은 기억도 나는데, 백석에 관한 얘기였을 것이다.
언젠가 물은 적이 있다. 고려대에서 학위를 했는데, 논문이 혹여 백석에 관한 게 아니였었냐는 것.
아니라고 했다. 정지용 시인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했다는 것인데,
그럼 왜 그리 백석에 집착하느냐고 물었다. 그에 대한 박 시인의 대답은 기억에 없다.
박 시인이 답을 안 했든지, 아니면 듣고도 내가 까 먹었든지.
아울러 술김에 괜한 쉰소리도 좀 했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이 앞서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모처럼 백석의 시를 대하니 역시 백석이라는 생각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컬 렉 션'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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