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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山사람 - 하광호, 그리고 노현섭.노상도 형제사람 2021. 4. 12. 10:51
고등학교 시절, 고향 마산의 이런 저런 지역 인물들 가운데 기억에 애매한 한 분이 있다. 하광호(河光浩)라는 분으로, 기억 속에는 마산에서 교육 일을 하고 이후 정계에 입문해 마산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정치권 인사로 알고 있었다. 당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이 분의 이름을 많이 들은 것은, 자신의 명의로 된 '하광호 장학회' 때문일 것이다.
공부는 잘 하지만 가정사정으로 면학이 어려운 학생들을 많이 지원했기에 기억 속에 '하광호'라는 인물이 그나마 남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반세기도 훨씬 전 고향의 인물이고, 이 분의 그 후 활동이나 행적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토요일 고등학교 동기친구들과 북한산 산행을 하면서 이 분을 떠 올리게 하는 계기가 있었다. 어떤 친구 하나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하는 얘기를 한 친구와 나누다가 이 분을 떠 올린 것이다. 안부가 궁금한 그 친구의 여동생이 '하광호 장학금'의 수혜자라는 걸 내가 얘기했는데, 막상 그 분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나와 얘기를 나눈 친구는 그 여동생이 당시 마산의 엄청난 실력자인 박종규 씨의 장학금을 받았다고 우겼다. '하광호'라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기에 그 친구의 말빨이 더 먹힌 측면이 있다.
산행을 하면서, 그리고 하산 후 뒷풀이를 하면서도 그 분의 이름을 떠 올리려 애를 썼는데, 성씨가 하(河) 씨인 것만 맴돌 뿐 이름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러다 집으로 와 검색을 찾았다. 하광호, 그 분에 대한 자료는 딱 한 가지다. 1971년 국회의원 선거에 나온 벽보용 선거후보 포스터였다.
그 포스터에 그 분의 당시 사진과 함께 학.경력이 부분적으로 적혀있었는데, 내 기억과 어느 정도 일치했다. 경남 함안군 내서면 출신이고, 마산고등학교를 나왔고, 일본 중앙대 법과를 졸업했고, 마산공고 교장을 역임했으며, 이후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 경남도당위원장 운운.
이 분의 이름을 알았고, 사진까지 획득했으니 장학금과 관련한 내 기억이 좀 더 명료해졌다. 친구의 여동생은 공부를 잘 했다. 마산여중에서 이화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것이 지역신문에까지 날 정도였다. 그래서 여동생은 '하광호 장학금'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얘기를 고등학교 동문 밴드와 동기친구들 간의 카톡방에 올렸다.
하광호 이 분의 생몰을 포함해 그 후의 행적 등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몰랐기에 글을 올리면서 그에 대한 어떤 코멘트를 기대했다. 반응이 나왔다. 밴드에서 한참 위 선배 한 분은 하광호 씨가 마산고등학교 1회라는 사실을 알려줬고, 재학시절 수재로 손꼽혔다고도 했다. 카톡방에서는 한 동기친구가 좀 더 사적인 얘기를 올렸다. 하광호 씨가 자기 선친의 절친한 친구라는 것으로, 어릴 적 오동동 자기 집으로 자주 들락거렸다는 것.
노현섭(1920-1991) 선생
친구의 이 얘기가 하광호 이 분의 좀 더 구체적인 스테이타스(status)에 접근케 했다. 나 또한 어릴 적 그 친구 집을 많이 들락거렸기에 그와 관련한 어렴풋한 기억을 떠 올리게 했다. 친구의 선친은 노현섭(1920-1991) 선생이다. 1950, 60년대 노동운동과 야학운동을 주도했고, 보도연맹 사건을 포함해 6.25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와 관련한 진상규명에 일생을 바치신 분으로 마산에서는 추앙을 받고있는 인물이다.
노현섭 선생도 일본 중앙대학 법과를 나온 엘리트였다. 그러니까 하광호 씨와는 대학동문인 셈이고, 또 하광호 이 분 또한 마산공고 교장을 역임하는 등 교육 일에 헌신적이었기 때문에 공민학교 등 마산지역의 야학사업을 주도했던 노현섭 선생과는 이래 저래 연이 많았고 친분 또한 남달랐을 것이다.
두 분이 일본유학의 대학동문으로 절친한 사이였지만, 인생경로는 달랐다. 노현섭 선생은 5. 16후 정치사범으로 옥고를 치른 후 십수년 간을 가택연금 상태의 불우한 시절을 살았다. 그에 비해 하광호 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청와대비서관과 집권당의 지역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당시 정권의 실세로 살았다.
특히 노현섭 선생은 그 가족사가 비극적이다. 민간인학살 피해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노 선생의 형님이 노상도(1911-1950) 씨다. 와세다대를 졸업한 동경유학생 출신으로 동생 현섭과 함께 일본 유학을 한 엘리트였다.
상도 씨는 유학 후 마산으로 돌아 와 마산고등학교 수학선생을 했다. 그러는 중에 보도연맹 사건을 접했고, 그에 연루된 혐의로 1950년 억울하게 처형되는 희생자가 됐다. 그러니까 노현섭 선생이 보도연맹 피해희생자 진상규명을 위해 거의 일생을 바쳤던 것은, 형님의 억울한 죽음과 애도하고 추모하려는 비극적인 가족사의 한 단면이 서려있는 것이다.
하광호 씨에 관한 자료는 찾아보면 더 나올 것이다. 노현섭 선생의 아들인 친구를 통해서도 더 구체적인 얘기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절친 친구사이였지만, 인생 경로가 좀 달랐던 노현섭과 하광호 이 두 분의 친교가 어떻했을까도 궁금하다. 그렇다고 두 분을 쾌도난마 식으로 갈라 나눠보겠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우연히 접한 고향 마산의 한 선배 인물을 두고 이렇듯 많은 얘기가 이어진다.
동경유학 시절의 노현섭(앞 줄 왼쪽)과 노상도(뒤 오른편)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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