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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잡동사니 정리, 혹은 버리기
    세상사는 이야기 2019. 4. 24. 19:46

    나이들어 가면서 아내와 다툴 일이 별로 없다.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지만, 내가 아내 말을 잘 듣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아내 말을 잘 듣는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이기(利己)의 측면이 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게 나로서는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내 말을 잘 듣는다는 게 실제로는 정말 그렇게 한다기 보다는 그저 건성으로 듣는 체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내가 집 에어컨을 바꾼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어찌어찌 싸고 합리적인 것을 구해 놓았다고 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래 잘 했네" 했다. 지난 해 여름 무척 더웠을 때 아내가 고생한 것을 잘 안다. 구닥다리 에어컨은 거실에 있기에 아내가 있는 안방에까지의 냉기는 어림도 없다. 올해도 그 고생을 할 수 없다며 아내가 팔을 걷고 나서 그여코 신형 에어컨을 마련키로 한 것이다.

    며칠 전, 아내는 에어컨 설치가 내일 모래라고 했다. 이틀 앞두고 아내가 나에게 그 말을 한 것은 에어컨 설치와 관련해 집과 짐 정리를 하라는 것이다. 귀찮은 일이다. 그래서 내 대답이 좀 퉁명스러웠을 것이다. 한달 전 처음 에어컨 얘기를 했을 때는 그래, 그래 했지만, 막상 이틀 후에 설치를 한다고 하니 귀찮고 번거로운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략 어떻게 어떻게 하자고 말을 나눴지만, 순탄한 상의는 아니었다.

    아내는 거실 한 쪽과 안방 책상, 그리고 베란다에 쌓여있는 책들과 각종 잡동사니들을 어떻게 좀 정리해 버리라고 했다. 물론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 잡동사니들을 생각하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우선 힘이 부칠 것이다. 베란다에는 육중한 스피커(Fisher) 한 조 외에 옛날 듣던 각종의 오디오 기기들이 먼지 속에 쌓여있다. 거실에는 거의 20년 간 붙박이 처럼 놓여있는 옛날 카셋 라디오 등 잡동사니들이 많다. 그리고 또 책과 각종 인쇄물과 서류뭉치들. 아내는 모두 갖다 버리길 원했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될까.

    어제부터 나 혼자 일을 시작했다. 우선 거실에 있는 것부터 대략적으로 정리했다. 책과 인쇄물, 서류 등을 구분없이 몽땅 큰 상자에 담아 버리자. 그렇게 마음 먹었지만, 그게 잘 되질 않는다. 책이든 서류든 일단 눈에 읽혀지면, 그에 미련이 남는 것이다. 선별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두어 시간 걸렸을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힘이 들었다. 결국 분류해 놓고보니 반반이다. 다음은 잡동사니. 일단 거실에 있는 것부터 버리자. 카셋 라디오는 몇십년 간 잘 들었다. 아직도 음량이 중후한 게 좋다.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순간 아내를 떠 올렸다. 죽을 때까지 끼고 살 것도 아니고... 결국 라디오를 버렸다. 큰 것을 버리고 나니 좀 담대해졌다. 대략 거실에 있는 잡동사니 3분의 2를 버렸다. 앞 집에서는 아마도 이사갈 준비라도 하는 것으로 알았을 정도로 현관을 드나들었다.

    드디어 오늘 d-day, 에어컨 설치 기사가 왔다. 그들의 힘을 빌었다. 베란다의 스피커와 오디오 기기들을 현관 밖으로 내 놓았다. 그리고 안방의 책들과 잡동사니들도 대략 정리해 버릴 것은 버리고, 갖고있을 것은 다른 방으로 옮겨 놓았다. 이런 일들을 포함해 에어컨 설치하는데 거의 세 시간 정도가 걸렸다. 비지땀을 흘렸다. 덕지덕지들한 잡동사니들이 사라지고 정리된 거실을 보니 과장을 좀 보태 새 집같은 느낌이 든다. 더 넓어지기도 했고. 시원하다는 마음에 문득 이런 다짐을 부춘긴다. 버리자. 더 버리자. 버리자 모두 다 버리자. 갖고 있어봤자 볼 일도 없을 책과 자료들 몽땅 다 버리자. 버려야 한다는 것은 우선 생각 자체가 시원한 것이었다. 뭔가 새로운 희망같은 것을 안겨준다고나 할까. 내일부터 다시 버리기 모드로 들어갈 것이다.

    '일'을 끝내니 아내와 주고받는 말들이 순조롭다. 이심전심이었을 것이다. 아내는 외출을 한다고 했다. 그 말 속에 어떤 홀가분함이 전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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