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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신문, 혹은 신문지(新聞紙)세상사는 이야기 2019. 9. 9. 08:05
종이신문을 두 개 보고있는데, 이걸 이제 끊어야 할 것인지를 고민 중이다. 집에서는 물론 나만 보지만, 나 또한 언제인가부터는 잘 안 보아지게 된다. 그러니 쌓이는 것이 신문이다. 마누라도 신문에 대해 곧잘 주절댄다. 왜 잘 보지도 않는 걸 돈을 주고 구독하느냐에서부터 식탁 의자 망가뜨린다며 야단도 곧잘 한다. 식탁 의자 하나에 신문을 쌓아놓고 있는데, 그게 한 일주일이면 그 양이 의자를 내려앉힐 정도의 무게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주 재활용 수거일이면 신문 내다버리는 건 절대적으로 내 몫이다.
종이신문이 우리 집에서조차 이런 식으로 푸대접을 받는다는 현실이 나로서는 안타깝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누가 뭐래도 종이신문의 예찬론자로서 종이신문을 부여잡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나 또한 이런 지경이니 말이다. 내가 신문에서 좀 멀어지려는 것은 신문이 잘 보아지지 않는 것이 우선 그 이유인데, 물론 그것은 스마트폰이나 PC 등을 매개로 한 인터넷 신문 때문이다. 뉴스는 이것들로 모두 볼 수 있다. 종이신문으로도 물론 볼 수 있지만, 속보성에서는 달린다. 나는 속보성은 그닥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뉴스의 심층적인 보도나 배경 해설 등은 종이신문이 다른 매체들에 비해 훨씬 났다. 내가 종이신문을 절대적으로 선호해 온 건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즈음들어서는 뉴스 해설도 잘 안 보아진다. 왜 그럴까. 나이 탓일 것으로 나는 본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객관적인 각도보다는 내 생각으로 보고 재단하고자 하는 고집이 그만큼 굳어졌기 때문일 것이라는 나름의 분석을 해 본다. 말하자면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나 자신의 관점으로만 보려는 고집이 나이가 들면서 더욱 굳어졌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심층적인 해설이나 기획 피처(feature) 기사는 종이신문이 갖는 장점이라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이제 그게 읽혀지지 않는 것이다.
신문 언론의 말석이나마 그것을 직업으로 가진 탓도 있지만, 신문은 철들고부터 그냥 곁에 항상 있어야하는, 소식을 접하는 가까운 物性의 그 어떤 것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곁에서 떠나보내야 마느냐를 궁리 중인 것이다. 그 궁리 속에는 신문을 그냥 잘 안 보는 것이니, 단순히 어떤 효용적인 측면에서 단절하는 게 맞는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고민도 있다. 아직 결정은 미적거리고 있다.
사진은 현직에 있을 때 쓴 글인데, 이글을 조선일보 사보에서 실은 것이다.
(엉뚱한 얘기지만, 종이신문의 효용성에는 종이라는 물성으로서의, 신문지(新聞紙)가 갖는 그것도 있다. 가난한 노인 분들의 생계와 관련된 폐지줍기에 신문지는 항상 낀다. 우리 집 마누라가 신문에 대해 그렇게 타박을 해대지만, 신문지를 필요시하는 때도 있다. 명절날이나 제사 때다. 제사상에 올리는 생선이나 전을 굽고 붙일 때 날 지난 신문지는 마누라 앞에서 춤을 춘다. 일본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작품에 '신문지'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그 소설에서 신문은 잘못 임신한 어느 간호사가 몰래 아이를 낳을 때 핏덩어리 아이를 싸는 '싸개'로서의 도구가 된다. 소설에서 피로물든 '붉은 신문지'라는 표현이 몇 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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