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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나와 또스토예프스키의 '백치(白痴)'사람 2019. 10. 18. 15:08
대학 다닐 적 창신동에서 하숙할 때가 있었는데, 그 시절 유독 배가 고팠다.
선배와 함께 있었는데, 무슨 놈의 하숙집 인심이 그런지 하루 두끼만 주었다.
밥, 그것도 고봉이 아니라 밥 그릇에 살랑살랑 담아주니 배가 안 고플 수가 없었다.
선배와 밥상을 마주하고 앉으면 서로의 밥 그릇을 비교한 다음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누구든 먼저 밥 그릇을 비우면 빼앗아 먹으려고 한 바탕 난리법썩을 떨던,
그런 창신동 시절이었다.
그 배고픈 시절에 생각나는 책이 있다.
또스토예프스키의 ’白痴’라는 소설이다.
배가 고프면 그 책을 봤다. 그래서 그 책은 잊을 수가 없다.
므이쉬킨이란 이름이 어렴풋이 생각나지만, 그 소설의 줄거리나 내용은 이제 기억에 가물가물하다. 나의 난독증도 작용했었겠지만, 배고픈 상태에서 봤으니, 내용이 머리에 자리 잡았을리가 있었을까 싶다.
그리고 또 하나, 그게 참 어려운 소설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그러니 그 책하면 떠오르는 것은 배고픔과 나의 독해력에 대한 절망감이다.
다만, 또스트예프스키 소설 특유의 그 음험스런 회색 빛 러시아와 러시아인의 이미지는 내게 남겼다.
그런데, 그 책이 또 나를 절망케 한적이 있다. 그게 2007년이다.
나는 스무 살이 넘어서 쩔쩔 헤매며 겨우 본 그 책을 첼리스트 장한나는 12살 때 영문으로 봤다는 것을 어느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 책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코멘트까지 덧붙인다.
당시 나는 그 기사을 읽으며 장한나는 역시 천재라는 생각과 함께 나 자신에 대한 절망감마저 들었었다.
그 장한나가 이번에는 노르웨이 유수의 오케스트라 악장 겸 지휘자가 되어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귀국했다.
지휘하는 모습의 장한나를 보러 예술의 전당으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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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07년 6/16 [책과 인생] 장한나,
12살 때 읽은 영문판 ’백치’
영어에 눈 뜨게 된 계기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읽으면 너의 마음이 열릴 것이다."
지난 4월 타계하신 나의 스승 로스트로포비치 선생님의 부인 갈리나가
해준 말이다. 그때 난 열두 살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부터인가,
세계동화전집 등을 통해 독서를 너무나도 좋아하게 됐다.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성격,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그들의 흥미진진한 삶, 그리고 정의의 승리로 마무리되는동화 속 세상에 푹 빠졌다.
재미있는 책을 잡으면 밥 먹을 때는 물론, 첼로 연습시간에도 읽기를
중단하기 힘 들어 발가락으로 책장을 넘기기도 했다.
처음 읽는 책에서 긴장과 스릴을 느꼈다면,
다시 읽는 책에서는 이야기 속 의미들을 찾고 즐기는 맛을 알게됐다.
뉴욕으로 건너갔을 때 열 살이었던 나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공립학교의 ESL 프로그램은 체계적인 영어공부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고,
12세부터 다닌 사립학교에는 그나마도 없었다.
11세 때 파리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만난 갈리나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영어판 <백치>를 구입 해 읽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12세 소녀에게 <백치>를 권한 갈리나도, 그 말 한 마디에
바로 <백치>를 읽은 나도 참 순수했던 것 같다.
인생을 바꾸는 힘이 책 안에 있다는 믿음을 공유한게 아닐까 싶다.
만일 지금 내가 12세 어린이에게 책을 권해야 한다면 <백치> <안나카레니나>
<파우스트>같은 명작을 권하기 전에 여러 번 생각할 것 같다.
너무 어렵지는 않을까,작품의 위대함을 소화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나도 내가 느낄 수 있는 만큼만 느끼고 이해하듯이, 어린이도 나름대로
어떤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런 명작들은 독자의 그릇 크기에 관계없이 어떤 충격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그런 충격을 통해 나의 그릇이 성장하고, 그 책을 다시 읽거나 다른 책을 읽었을 때
더 큰 감동을 받는 것이다.
서툰 영어로 <백치>를 읽은 후 과연 내 마음이 열렸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그때부터 거대하고 복잡한 사연들이 많은 러시아 문학에 반해서 톨스토이,
체호프, 도스토예프스키, 푸슈킨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순수문학, 그리고 소설이란 장르에 빠져 영국, 프랑스, 독일문학으로
폭을 넓혔다.
내용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단어 공부도 열심히 했고, 문장의 형태부터 표현력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영어의 비밀을 자연스럽게 흡수했다.
고등학교 무렵에는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으며 에세이를 제출할 만큼 영어실력이 늘었다.
독서를 통해 영어를 쉽고 즐겁게 마스터했을 뿐아니라 통찰력과 표현력을 기르는데도
더 없이 좋은 훈련이 됐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어휘와 표현은 언어자체의 폭에 비해 너무나도 좁다.
표현력이 좁은 만큼 우리의 생각도 단순해지는 건 아닐까.
책을 통해 언어의 풍요로움을 접한다면 우리의 시각이 더욱 넓어지고 성장하리라 믿는다.
또 이런 과정을 통해 인생을 풍요롭게 사는 지름 길을 찾게되리라 믿는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0/18/20191018002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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