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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짜르트의 모짜르트', 클라라 하스킬(Clara Haskil)사람 2020. 5. 28. 17:22
클래식 음악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러나 좋아하는 연주가는 있다.
그 중에서도 클라라 하스킬(1895-1960)을 제일 좋아한다.
그녀는 인생과 음악이 모두 극적이다.
역정으로 점철된 인생도 그렇지만,
모짤트, 브람스, 쇼팽을 넘나든 과정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하스킬을 좋아하게 된 연유가 있다.
윌리엄 스타이런(William Styron)의 소설인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에는
모짤트 음악이 많이 등장한다.
소설 속 시련의 화신인 소피와 모짜르트의 음악이 어울리기 때문이었기 때문일까.
소피와 그녀의 연인인 네이단(Nathan)은
모짤트 피아노 협주곡 24번 2악장 라르케토(larghetto)를 특히 좋아한다.
그 소설, 그리고 영화에 빠지면서 나도 그 2악장 라르게토를 좋아하게 됐다.
인사동 골목에 주점이 하나 있었다.
와인 등을 파는 집이었는데, 그 집 여주인이 모짜르트를 좋아했다.
그 집을 갈 때마다 모짜르트의 음악이 흘러 나왔다.
그 곳에서 2번 라르게토를 정말 많이 들었다.
클라라 하스킬을 알게 된 것도 그 집에서다.
많은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모짜르트 피아노 연주를 그 집에서 들었다.
그 중에서 눈을 감고 들어도 알 수 있는 것은 클라라 하스킬의 모짜르트 였다.
그 집 여주인이 하스킬을 많이 닮았다. 그래서 그런 말을 종종 해줬는데,
마담이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 마담의 인생역정도 대단했다. 그래서 였을까.
벌써20년도 지난 얘기다.
어느 날, 인사동 그 골목으로 갔더니 그 집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랐다.
지금껏 찾고있지만 아는 사람이 없다.
하스킬의 모짜르트를 들으면 그 집과 그 마담이 생각난다.
지난 4월의 어느 봄날, 국민대 쪽에서 북한산 대성문으로 오르면서 하스킬의 모짜르트를 들었다.
2번 라르게토를 들으며 오르는 봄빛 완연한 북한산 산길.
연홍빛 진달래와 노란 산수유, 그리고 코발트 색 하늘이
느릿느릿 라르게토 음율 속에 내 가슴에 하나로 녹아 내렸다.
모짜르트, 소피, 하스킬, 그리고 인사동 그 여주인 생각.
시간의 경계가 따로 없이 녹아 내리고 있었다.
이따금 주체할 수 없는 전율이 가슴을 휘감아 치기도 했다.
(아래는 누군가 하스킬에 대해 쓴 글입니다. 인용하고자 합니다)
아름답고 슬픈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Clara Haskil 1895. 1. 7. ~ 1960. 12. 7)
독일의 비평가 요하임 하이저는
자신의 저서 『우리 시대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에서
클라라 하스킬에 대한 얘기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클라라 하스킬,
1960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녀는 '피아노의 성자'로 일생을 살아왔다.
굳이 하이저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의 전기를 읽어보고
그의 음악을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피아노의 성자'란 말에 공감을 할 것이다.
20세기를 살았던 어떤 피아니스트보다 많은 신화를 남기고
한 인간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굴곡 많은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였기 때문에
세계 음악사는 그렇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짧은 글이지만 그의 위대한 삶을 재조명하고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루마니아의 별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895년 루마니아의 부카레스트에서
스페인계 유태인이었던 부모사이의 세 명의 딸 중 두 번째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성공한 유태인이었으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가 4세 때에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언니 릴리는 피아노를, 동생 안느는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그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가 처음 천재성을 나타낸 것은 6세 때의 일로 악보를 전혀 모르던 그가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단 한번 듣고 그 자리에서 악보도 없이 연주하는가 하면
다른 조로 변조하여 연주하는 것을 보고 주변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즈음에 브람스와 요아힘의 친구이기도 했던 안톤 도어는 이 아이를 보고
'이 아이는 기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10세 때에 뵈젠도르프 협회에서
솔로 리사이틀로 데뷔하여 세상을 또 놀라게 하고
이듬해인 1906년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여
가브리엘 포레와 알프레드 코르토에게 사사받게 되는데
3개월이 지나자 코르토는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자신의 천재적 감각과 영혼의 세계에서
직관적으로 터득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고백에서 그의 겸손을 엿볼 수 있는데
"청소부나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연주하는 것 외엔 무엇하나 몸에 익힌 것이 없으니······"
"모르겠어요. 나는 지금의 내 연주가 이전보다 더 나아졌다고는 생각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제 와선 모든 사람이 내 연주를 듣겠다고 하니 말이에요"
15세 때인 1910년, 졸업 연주회에서는
당대의 쟁쟁한 음악가인 포레, 에네스쿠, 모츠코프스키가
졸업시험관으로 있었다.
그녀는 최고의 상을 받고 졸업을 하고
이 때부터 본격적인 연주 생활에 돌입하게 된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자이의 반주자로, 루마니아의 대 바이올니스트인
에네스쿠와의 협연, 그리고 카잘스와도 협연하기도 하였다.
1911년 당대의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부조니는
자신이 편곡한 바흐의 「샤콘느 d단조」를
연주할 것을 요청하고 즉석에서 연주한 그녀에게
'기적과 같다'라고 감탄했다.
몽환적인 미모까지 갖춘 그녀의 연주자가로서의 삶은 순항할 것 같이 보였다.
부조니는 그 뒤 그녀를 베를린으로 데려가고 싶어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홀로 딸을 키워온 어머니는
딸을 홀로 베를린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고
이는 하스킬의 맘에 큰 아쉬움으로 남게되었다.시련을 딛고
1912년에는 파데레프스키가 미국 공연을 주선을 했다.
그러나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려 할 때 즈음 18세의 나이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시련이 다가왔다.
<세포 경화증>이라는, 뼈와 근육이 붙거나 세포끼리 붙어버리는
불치의 병에 걸린 것이다.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겸비한 소녀에게
불행히도 신은 모든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4년 동안 그녀는 몸에 깁스를 한 채 살아야 했다.
그리고 두 번째의 시련이 찾아왔다.
그의 투병 생활 중에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고
피아노 다음으로 소중하게 여겼던 바이올린 연주를 중단해야만 하는
좌절감에 빠졌던 것이다.
발병 이후 1921년까지 8년간의 긴 시간을 음악과 떨어져 살아야 했으며
병의 후유증으로 아름다운 모습은
등이 휘어버려 곱추가 되었으니
자신의 내면에 얼마나 고통이 뒤따랐는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모든 사람들은 그가 연주자에게 8년이란 세월 동안 연주생활을 하지 못하자
그녀의 음악인생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1921년 그녀는 모차르트와 함께 다시 연주회에 나타났다.
이전에도 '하스킬의 모차르트'라는 수식어보다도
'모차르트의 모차르트'란 명성을 얻었던 그녀였기에······
관중들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경악하고 한편으론 애처로운 맘을 가졌으나
정작 그녀 자신은 담담하였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음악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평온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하스킬은 자신의 일생을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행운아였습니다. 나는 항상 벼랑의 끝에 서 있었어요.
그러나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한번도 벼랑 속으로 굴러 떨어지지는 않았다는 것,
피할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은 신의 도우심이었습니다."
보통사람으로선 생각할 수 없는 용기이자 의지였다.
어느 누가 특별한 잘못도 없이 자신에게 찾아온 '장애'를 감사하며
순응할 수 있을까. 하스킬은 자신의 삶에 던져진 쓴잔을 받아 마셨고 그런 용기로 다시 일어났다.
사람들은 그녀의 의지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고
재기에 성공한 하스킬은 1924년부터 캐나다와 미국 연주, 1926년 영국에서의 연주회,
1927년 파리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이자이와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회를 가졌다.
이 때부터 1949년까지는 주로 파리에서
당시 유럽 음악계의 후원자로 널리 알려진 폴리냑 공작부인의 후원으로 활동하였고
공작부인의 살롱에서 개최하는 <음악의 밤>에도 자주 연주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모습을 아랑곳하지 않는 강한 의지력의 그녀였지만
그녀는 조용하고 수줍어하는 성격이었다.
절친한 친구도 없었고 병약해서 그녀는 동료들과 어울릴 수 없었고
다만 그녀만의 영혼의 음악세계가 있었을 따름이었다.
음악 속에서 강렬한 삶의 의지를 불태웠던 그녀에게
또 한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유태인이었던 그녀는 남 프랑스의 마르세유로 피신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극도의 공포와 피곤으로 뇌졸중을 일으켰다.
실명의 위기에 부닥쳤으며 각종 신경계에도 종양이 생겨
긴급 수술을 받지 않으면 살아나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유명한 유태계 의사가 파리에서 마르세유까지 달려왔고
어려운 수술을 거쳐 간신히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하스킬은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다시 벼랑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기까지 2년 동안 그녀는 유태인이라는 '죄'로
바이올린 한 대,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피신생활을 해야 했다.필생의 연주
"이번에도 또 집행유예가 내려졌군요"
하스킬의 천재적 직관력과 기억력은 나이가 들어도 쇠하지를 않았다.
1937년 42세 때 갑자기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이 곡을 이틀만에 완전히 암기했다.
또 한번은 스위스에서 연주하기로 한 호로비츠가 제때 도착하지 않아
불안해하던 헤르만 셰르헨으로부터 대역 연주자로 요청 받았을 때에는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말 그대로 한나절만에 암기해 버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피아노 악보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악보까지 외웠다는 사실이다.
레코드 팬들에게 그녀는 <모차르트 연주가>로 인식되어 있으나
연주회의 기록을 보면 라흐마니노프, 브람스, 생상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였으며,
코벤트 가든에서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앙세르메와 협연하였을 때
언론은 "클라라 슈만이 연주한다 해도 이보다 나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1952년 루체른 음악제에서 그녀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한 존 바비롤리는
"클라라의 연주를 듣고 나자
쇼팽 자신이 연주해도 이런 식으로 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이 곡에 대한 나의 불만은 사라져 버렸다"라고 극찬하였다.
많은 음악가와 평론가들이 그녀의 모차르트에 대해 찬양했다.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는 그녀의 연주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진실에 가까운 모차르트"라고 칭송했다.
어떠한 꾸밈도 없고 과장도 없이 다만 마음을 넣어 음을 굴리는 것만으로
만인의 가슴에 파고드는 감동을 느끼게 해준 것이 바로 그녀의 모차르트였다.
여하튼 하스킬은 과거 존재했던 최고의 모차르트 연주자의 한사람이며
그녀가 남긴 모차르트의 녹음의 대부분이 주옥같다는 것은 의심힐 여지가 없다.
그녀의 연주를 직접 접한 사람들은 "레코드를 통하여 듣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실제 연주는 더욱 더 훌륭하다."라고 말한다.
그런 그녀였지만 병약한 체질을 안고
수많은 대중 앞에서 연주를 하는 일은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녀 역시 건반 위에서 매일 몇 시간씩 옥타브와 음계, 도약 등을 연습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쉽게 피곤함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주가로서 그녀의 분위기는 거의 카리스마적이었다.
때문에 연주를 듣는 동안만큼은 아무도 그녀의 장애와 피곤을 알지 못했다.
그녀의 음악은 그렇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있었다.
말기의 그녀는 항상 죽음을 의식했는데 특히 파리연주회에서
심장 장애를 일으킨 이후로 이런 생각은 더욱 심해졌다.
연주 중에 자신의 생이 끝날 것이라는 강박 관념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연주가 끝나면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번에도 또 집행유예가 내려졌군요"
우리는 그녀를 '피아노의 성자'라 부른다
죽음에 대한 하스킬의 예감은 그녀의 예상대로
그뤼미오(하스킬은 말년에 아들 뻘 되는 그뤼미오와 호흡을 맞춰
최상의 콤비를 이루었음)와의 연주여행 중에 일어났다.
1960년 12월 파리에서 그뤼미오와 "소나타의 밤을" 가진 후,
다음 공연을 위해 기차로 브뤼셀에 도착하여
역의 계단을 내려오던 중 순간적인 현기증이 일어나 계단에서 굴렀다.
의식 불명 상태로 병원으로 실려간 그녀가 잠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에
그녀의 동생에게 "내일 공연은 힘들 것 같구나. 그뤼미오 씨에게 죄송하다고 전해 주렴"
이것이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
다시 혼수 상태에 빠진 하스킬은
다음날 아침 모차르트가 먼저 가 있는 곳으로 영원히 떠나고 말했다.
66세의 생일을 한달 남겨놓은 1960년 12월 7일 이른 아침이었다.
러시아 피아노계의 대모 타티아나 니콜라예바가 처음으로 잘츠부르크를 방문할 때
러시아 음악인들은 니콜라예바에게
"서방에 가거든 카라얀이란 지휘자의 콘서트에 꼭 가보도록 해.
그는 새로운 토스카니니로 알려져 있어"라고 조언하였다.
그녀는 카라얀의 모차르트 연주회가 있어 이에 참석했고
이 때의 협연자는 하스킬이었다.
니콜라예바는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이 때의 감동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녀의 몸은 뒤틀려 있었고, 잿빛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마치 마녀처럼 보였다.
그러나 막상 공연이 시작되자 카라얀의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건반으로 손을 옮기자 나의 볼에는 곧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실로 내가 평생동안들은 최고의 모차르트 전문가였다.
그녀의 마력은 너무나 강력해서
오케스트라의 총주가 다시 울려퍼질 땐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풍부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음이 오케스트라로 전달되어 지휘자마저 마술에 걸려있었다.
그녀 덕택에 그들 모두는 음악적 진실을 접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이것은 내가 경험한 최고의 콘서트가 되었다."
“나는 살면서 진정 천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세 명 만났다.
한 사람은 아인슈타인이었으며, 한 사람은 처칠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 누구보다도 현격히 차이나는 두뇌의 소유자는, 바로 클라라 하스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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