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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춤꾼' 이애주 선생(2014)
    사람 2020. 5. 30. 06:34

    춤꾼 이애주 선생을 인터뷰했다.

    잘 알려진 분인데 물을 게 뭐 더 있겠는가.

    '神氣'에 관해 물었다.

    춤출 적에 그런 감이 없지 않는가 하는.

    왜 없겠어요 한다. 무슨 뜻?

    살풀이를 출 때 집중을 하고 들어가면

    보는 사람들이 울기도 눈물도 흘리기도 한다.

    그들에게 감춰진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춤의 기운이 보는 이의 본성과 그를 둘러싼

    번뇌와 괴로움, 슬픔의 '살'을 때리면서 맞아 떨어져

    우리는 하나가 되어 버린다. 그 때 나는 몸주신이 된다.

    번뇌와 슬픔은 눈물과 함께 살아져 버린다.

    나는 구름 위에서 춤을 춘다. 내가 이름을 붙였지.

    구름사위라고.구름사위를 할 때 신기를 느끼지. 아니 신성 그 자체지.

    그러나 그렇게 초월된 상태로 가면서도 중심은 잡지.

    중심을 못 잡아, 넘어가버리면 무당이 되는 거고,

    나는 중심을 잡으니 예술가가 되는 거지.

    뀅과리 치는 '진쇠' 김복만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무대 위에서 한참 치면서 무아지경에 빠지면,

    어느 새 몸이 붕 뜬다.

    그러면 위에서 보고듣는 사람을 내려다 보게 된다.

    그 상태에서 나는 뀅과리를 계속 치지만,

    나에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울고불고 하고 있지만.

    그런 神氣가 부럽다.

    지금의 번민과 괴로움을 일시에 몰아갔으면 하는.

    (2014. 5. 28)

     

     

    6년 전 이애주 선생을 만나러 관악산 아래 과천 촌동네를 찾아가던 때가 생각난다. 마음이 굉장히 혼란스러웠을 무렵이다. 어둡고 한적한 방에서 이애주 선생과 얘기를 나누고 과천 촌길을 걸어 나올 때 석양의 관악산 기슭에서 갖은 산새들이 울었다. 뻐꾸기가 유독 세게 울었다.

     

     

     

     

     

     

     

     

    “내면에서 터져나오는 우리 춤은 보여주기보다 나를 들여다보고 자유롭게 하는 춤이죠”


    우리 문화의 源流를 지키는 사람들_ 27. 인간문화재 ‘춤꾼’ 이애주 서울대 명예교수

     

    진짜 우리 춤은 보여주는 춤이 아니라 나를 들여다보고 자유롭게 하는 춤입니다.
    그런 춤을 우리 후손은 물론이고 세계 사람들도 배우러 오라고 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교육하는 학교가 있어야 하죠, 바라건대 춤 대학 하나 만들어 정말 제대로 된 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숨 쉬는 것부터 회음부 하단전에서 올라오는 깊은 숨을 훈련시키고, 그게 몸을 일렁일렁 움직여 춤으로 이어지다는 걸 가르치는 겁니다.

     


    우리의 전통 춤에는 갈래가 여럿 있다. 불교의식이나 무속의식의 장소에서 추는 주술적인 성격이 다분한 무속춤, 불교춤, 장례춤이 있고, 전문성을 띠지 않고 일반인들이 생활 속에서 여럿이 즐길 수 있는 축제적이며 놀이성이 강한 농악춤, 탈춤, 소리춤, 허튼춤, 모방춤 등의 大同놀이춤이 있다. 또 춤꾼들에 의해서 전문적으로 다듬어져 전승돼 춤 자체의 예능적 성격을 극대화 한 공연의 성격을 띠는 교방춤,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등이 있다. 구분은 이렇다는 것이지만, 이들 춤들은 서로를 넘나든다.

    예컨대 옛 선비들이 공부하다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추는 ‘선비춤’에 어떤 격식이나 기법이 없듯 우리 춤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생활과 삶의 몸짓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춤은 서양 춤처럼 단순한 표현양식이 아니다. 몸에서 저절로 배어 나오면서 몸짓의 구분으로 넘쳐나는 움직임이다. 이를테면 봄 버들가지에 물이 오르듯, 또는 이 골짜기와 저 골짜기에서 흐르던 샘물이 맞부딪쳐 굽이치듯 몸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자연스런 움직임인 것이다.


    이애주(67)는 이런 우리 춤의 모든 것을 배우고 익혔다. 다섯 살 때부터 춤을 배우고 췄으니, 자그마치 한 甲, 그러니까 60년을 넘긴 춤 인생이다. 그는 한국 전통춤을 집대성한 한성준과, 그의 손녀이며 수제자인 한영숙(1989년 작고. 승무 인간무형문화재)으로 이어지는 승무의 嫡統을 이은 인간문화재(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다. 이애주는 특히 그의 인간문화재 타이틀에서 보듯 승무의 명인이다. 승무는 우리 춤의 기본이면서 그 안에 모든 것이 수렴돼 있다는 점에서 이애주 춤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애주는 또 살풀이춤(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의 전수자이기도 하다. 아마도 우리 춤에 관한 한 최고로 잘 배웠고 그만한 지위를 꿰차고 있는 춤꾼이요 명인이다.


    그런 그의 우리 춤에 대한 정의는 간단명료하다. “삶의 몸짓이지요. 『魏志東夷傳』에 춤과 관련해 踏地低仰(땅을 밟고 하늘을 우러르다) 手足相應(서로 조화되게 손과 발을 놀린다)는 말이 나옵니다. 농경사회에서의 일 동작이 곧 춤인 것입니다. 몸에서 체득돼 생각과 정신으로 이어지는 연결선의 정점이 춤입니다.”


    우리 춤과 서양 춤과의 대비도 명확하다. “우리 춤은 곡선적이면서도 온몸을 놀리는 몸과 마음, 영혼의 춤입니다. 서양 춤은 직선적이면서 개체 개념의 집합이라는 점에서 건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춤은 내면으로 계속 쌓아가면서 추니까 몸짓 면에서 양의 동서를 다 뛰어넘어 모든 것이 융합된 중심의 몸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僧舞의 嫡統 인간문화재, ‘시국춤꾼’으로도 명성
    이 말 속에 우리 춤에 대한 그의 자부심이 배어있다. “김연아, 손연재가 잘 하는 것은 그들의 몸짓에 한민족 역사의 혼이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짧은 동작으로 끝내는 것을 김연아는 길게 늘이지 않습디까. 그건 단지 기교가 아니지요. 영혼의 움직임입니다. 나는 손연재가 체조하는 거 보다가 다른 나라 일등 선수가 하는 것 보면 심심해서 못 보겠습디다. 그들 것은 흐름이 뚝뚝 끊기는데 김연아, 손연재는 손 하나를 뻗더라도 좍 하는 연속적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강수진 같은 발레리나도 마찬가지지요. 긴 호흡으로 유려하게 선을 그리니 유럽 사람들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이지요.”

    ▲ 1987년 6월 26일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춘 바람맞이 춤. 이애주를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머스 커닝햄도 나온다. “머스 커닝햄을 서양 현대무용에서 굉장히 쳐주는데, 그 사람 공연을 미국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걷고, 어떻게 뛰고, 어떻게 돌고, 춤 제목이 그거예요. 무슨 내복 같은 걸 입고 무대에서 걷고 뛰고 그래요. 그때 머스 커닝햄이 우리 살풀이춤만 알았으면 저게 달랐을 텐데, 우리 승무를 알았으면 진짜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에 아깝다 싶었어요. 그러니까 우리 춤이 세계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애주는 글을 깨치기 전에 춤부터 깨친 사람이다. 서울 토박이인 이애주는 다섯 살 때 국립국악원 김보남 선생에게서 춤을 배운다. 승무, 춘앵무, 검무 등을 익힌다. 1965년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무용 전공으로 들어간다. 대학원을 거쳐 문리대 국문학과에 편입해 전통 민속춤에 대한 이론도 다진다. 1968년 당시 문화공보부 주최 신인예술상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당시 심사위원이던 한영숙 명인이 그를 눈여겨보고 제자로 삼았다. 열심히 배웠다. 그런 한편으로 그는 1982년 서울대 교수가 된다. 그리고 1996년 스승의 적통을 이어 인간문화재로 지정된다. 이런 과정이 아니더라도 이애주는 우리 춤에 깃든 정신세계와 역사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춤을 춘다. 의식 있는 춤꾼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그의 춤 인생에 변화를 주는 한 계기가 있었다. 1974년이다. 그 때까지 통용돼 써오던 무용이라는 말 대신 ‘춤’을, 그리고 발표회를 ‘판’으로 바꿔 부른 것이다. 그러니까 무용발표회를 처음으로 ‘춤판’으로 부르면서 그 자신의 것으로 달고 나온 것이다. 그 해 그가 벌인 ‘이애주 춤판’이 그것이다. 학계로부터 비난이 쏟아졌다. “그 당시에는 ‘이애주 무용발표회’라고 해야 했는데, 나는 도저히 그렇게 쓸 수가 없어 ‘이애주 춤판’이라고 했습니다. 왜냐. ‘무용’이란 말은 일제강점기 때 들어온 식민용어로서 그때부터 춤이, 몸짓이 본격적으로 왜곡되고 파괴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식민용어로 바뀐 우리말을 제대로 회복하려는 사람을 두고 불온한 용어를 쓰는, 색깔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분류했고 국립극장 ‘블랙리스트’ 10명 안에도 포함됐지요.” 기성세력인 이른바 ‘무용계’의 반발은 거셌다. 상스럽고 천민적인 냄새가 난다는 등의 질타가 뒤따랐고, 그때부터 이애주를 운동권, 심지어는 좌익으로까지 몰았다. 그러나 이애주는 꿋꿋했다. 우리 춤을 제대로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옳게 찾아낸 결과라는 입장을 끝까지 고수한다. 오늘 무용이라는 개념과는 별개로 춤과 춤판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우리 춤에 관한 말로 통용되는 것은 이애주의 공로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시기는 박정희 시대였다. 의식 있는 학생들 간에 군사독재와 유신독재에 관한 저항의식이 팽배해있던 때다. 이애주는 자신이 추는 춤으로 이 시대에 맞선다. 그에게 지금껏 따라붙는 별칭인 ‘민중춤꾼’ ‘시국춤꾼’으로서의 변신이 태동되던 시기다.

    그는 1970년대 초 서울대 문리대에 다니던 채희완 등이 결성한 ‘탈춤반’을 지도한다. ‘탈춤반’ 지도를 계기로 문리대생들과의 교유가 넓어졌고 이들과 어울리면서 민족과 역사의식의 궤를 넓혀간다. 물론 이애주의 중심에는 춤이 있었다. 1987년 6월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와 연세대 이한열 장례식장에서 춘 춤으로 이애주는 운동권 1세대 혹은 ‘민중춤꾼’으로서의 정점을 찍는다. 그때 이애주가 춘 춤은 그 시대 민주화를 위한 민중의 열망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그는 이후 조성만, 문송연, 이석규 등 당시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희생된 원혼들을 살풀이춤으로 달래면서 ‘시국춤꾼’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국립 서울대 교수라는 직위로서 참 부담스런 호칭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1987년 대선 때는 민중후보추대위원장을 맡아 백기완 후보 지지연설도 했으니 오죽했었을까. “당시 상황으로 감옥을 갔어도 여러 번 갔을 텐데 나를 둘러싸고 괜히 건드렸다가 무슨 일 터질지 모른다는 분위기였다. 나중에 동료교수로부터 ‘대학본부에서도 이애주를 건드리면 학생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여론에 밀려 물러섰다’는 말을 들었다. 안기부 같은 데서 협박은 말도 못하게 받았다.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는 것은 약과이고 차마 전할 수 없는 내용을 적은 편지, 전화를 계속 받았다. 아마 내가 정신이 약했으면 돌아버렸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우리 전통춤의 명인이면서 계승자임에도 ‘시국춤꾼’으로 불리고 있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시국 춤을 춘 상황, 그것도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전통춤을 쭉 추다가 어느 시기에 첨예한 역사적 진실과 만날 때 내가 나타날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것은 저항적이고 참여적인 사회춤, 현장춤이지요. 내가 운동권이 되고 그런 춤을 춘 것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춤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니 자연, 춤이 시키는 그대로 한 것일 뿐입니다. 아주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15년만의 공연 ‘天命’서 완판승무, “역시 이애주” 절찬
    우리 춤이 삶의 몸짓이고 영혼을 달래는 몸짓이기에, 의식이 함께 하는 춤의 정신에 따라 나선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우리 춤에 안기기에는 부족한 것이었을까. 이애주는 1988년을 끝으로 현장춤에서 멀어진다. 이 과정에서 그가 주도한 진보예술성향의 민예총과도 결별한다. 대신 침잠하며 우리 춤을 더 파고들어 공부한다. 한성준-한영숙류 승무를 익혀 1996년 인간문화재가 된다. 그리고 우리 춤의 뿌리를 찾아 고조선 강역과 바이칼호수 주변을 섭렵한다. 고구려 벽화에서 우리 춤의 원형을 발견하고 뿌리를 캐 가다 詠歌舞蹈를 접한다. 이애주 춤을 한 단계 높여주는 계기였다. 살풀이, 승무, 태평무 등 전통춤의 형식과 기교를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던 그가 기교와 형식의 한계를 뛰어넘은 자연에 가까운 춤의 세계를 형성한 게 그 시기였다. 이애주는 영가무도를 ‘오행소리춤’이라고 말한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아무 생각 없이, 무념무상으로 그러면 비장에서 저절로 소리가 울려 나와요. 음- 음- 이렇게. 우리 몸이 물속에 들어가 있을 때 내는 소리지요. 태아가 양수 안에 있을 때 소리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 다음은 아- 아- 이것은 폐장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어, 이, 우 소리가 나오는데 각각 간과 심, 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길게 숨을 쉬면서 느릿하게 이 소리들을 내면 영이고, 그것이 빨라지면 가, 그러니까 노래가 된다. 그러다가 무아의 경지에 빠져 흥을 느끼면 스스로 춤을 추고 뛰게 된다(舞蹈)”는 것이다. 이애주가 올해 벽두 ‘天命’이란 타이틀로 상서로운 춤판을 서울 한복판에서 펼친 것은 그간 갈고닦아 기예와 의미를 넓힌 우리 춤에 대한 소산이다.

    15년 만에 개인공연을 하면서 ‘天命’으로 화두를 삼은 것은 인간의 本然之性이 천명이고 본래 여여하게 있는 근원적인 진리라는 점에서 이애주와 그의 춤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계기로 받아들여졌다. 이애주는 이 공연에서 완판승무를 선보여 “역시 이애주”라는 절찬을 받았다. 그는 추기 난해한 이 완판승무를 고집스레 추워왔었다. “승무가 우리 춤의 모든 춤사위가 융합돼 있는 전통춤의 백미로, 우리 삶 속의 모든 것이 응축된 춤이라는 소신의 실현이지요.” 공연 전에 이애주는 “완판 승무는 50분 정도 걸린다. 그 50분 안에 우주만물의 원칙을 보여줘야 한다. 하나도 덜어내지 않는 승무로 이념과 시대의 바람에도 불변하는 한국 춤의 뼈대를 세워 보이겠다”고 말했는데, 그 약속을 지켰다.

    ▲ 아시아 여성 뉴미디어展 오프닝으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살풀이를 추고 있는 이애주. 친구인 김순기와 공동으로 펼친 퍼포먼스로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비디오물로 계속 돌아가고 있다(왼쪽 사진). 역시 김순기 개인전에 출품된 디지털 비디오 합성 영상물인 ‘애주-애주-애주’. 이애주가 詠歌舞蹈를 하고 있고 나비, 두꺼비 등이 자유자재로 날고 들고 있다.


    이애주는 2012년 교수직을 정년으로 끝내고 명예교수로 있다. 지금 그는 경기도 과천 관악산 기슭에 산다. 인간문화재니까 전수의 의무가 주어진다. 그의 거처가 전수소 역할도 한다. 그는 여기서 먹고 자며 전수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1월 ‘천명’ 공연을 한 이래로 몇몇 의미 있는 공연을 가졌다. 그 중 하나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아 여성 비디오 아티스트 7인의 작품전 개막식에 초대받아 춤을 춘 것이다. 이 작품전에 초대된 한국 작가는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김순기로, 이애주의 친구다. 이애주는 오프닝에서 김순기와 ‘침묵의 소리를 들어라’ 퍼포먼스를 펼쳤다. 음악이 아니라 바람 소리, 주위의 자동차 소리, 관람객의 발자국과 대화 소리가 섞여 크지 않게 들리는 여러 소리들 속에 이애주는 춤을 췄다. 살풀이다. 마침 그때가 세월호 참사로 나라가 비탄에 잠겨있던 시기라 진혼의 의미로 그 춤을 춘 것이다. 이애주는 뭔가 웅얼대고 있었다. 나중에 물었더니 『천부경』이라고 했다. 이애주의 이 춤은 미술관 전시마당 곁 복도에 비디오로 촬영돼 현재도 돌아가고 있다.


    이애주와 김순기는 수십 년간을 이어오는 친구사이지만 늘 예술을 통해 전통과 현대를 잇는 작업에 머리를 맞대고 있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였던 존 케이지도 가세한 작품도 있다. 김순기가 4월 19일부터 서울 선재아트센터에서 갖고 있는 개인전에도 이애주가 나온다. 김순기가 영가무도를 하고 있는 이애주의 모습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이용해 무작위로 편집한 디지털 영상과 합성한 작품이다. 작품 이름이 ‘애-주-애-주(AIE-JOU-AIE-JOU)’다.


    이애주의 이런 작업은 언뜻 보기에 그가 우리 전통에만 머물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좀 파격적이다. 전통과 현대의 만남, 혹은 전통에 현대적인 것을 가미한 것쯤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애주는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우리 전통에는 현대적인 그런 것까지 포용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즉흥적으로 이렇게 해보니 양의 동서나 시공을 초월해 하나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애주의 춤 세계가 그 기교와 형식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고 있는 것으로 들렸다. 궁극적으로 그의 몸짓 하나하나는 우리 춤 원형의 복원과 창조인 동시에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하는 몸짓이며, 나아가 인간의 삶의 몸짓과 그 본질을 춤으로 형상화해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60대 후반에 들어선 이애주가 이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우리 춤을 내가 어려서부터 해온 만큼 제대로 정리를 해 잘 맥을 이어 나보다 나은 후학들이 나왔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교육하는 학교가 있어야 하는데 그 게 없어 안타깝습니다. 바라건대 춤 대학 하나 만들어 정말 제대로 된 춤을 가르치고 싶지요. 숨 쉬는 것부터 회음부 하단전에서 올라오는 깊은 숨을 훈련시키고 그게 몸을 일렁일렁 움직여 춤으로 이어진다는 걸 가르치는 거지요. 진짜 우리 춤은 보여주는 춤이 아니라 나를 들여다보고 자유롭게 하는 춤입니다. 그런 춤을 우리 후손은 물론이고 세계 사람들도 배우러 오라고 하고 싶지요.”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2014.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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