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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그리고 '일 포스티노'
    사람 2020. 5. 31. 08:22

    이론을 씹기를 거부함* (I Refuse to Chew Therories)

    내 편집자이자 친구인 <에니오 실베이라>는 브라질의 세 명의 시인들이 번역해 준 내 시집에 몇 마디의 소개의 말을 넣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지금 나는 긴 식탁에서 건배를 올려야 하는 사람처럼, 무엇을 말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나는 쉰세 살이지만, 시가 무엇인지,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정의할지도 모릅니다. 이 어둡지만 매혹적인 주제에 대해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조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였을 때나 성인이 되었을 때나, 도서관이나 작가들보다는 강과 새들에게 더 관심을 보였습니다.

    시인의 영원한 의무가 인민, 가난한 이들, 그리고 착취당하는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가? 글을 쓰는 사람, 시를 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집념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이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는 사랑은, 그 강렬한 카드를 탁자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가끔 시에 대한 논문을 읽기 시작한 적이 있었지만, 끝까지 읽은 적이 없습니다. 지나치게 유식한 사람들은 스스로 빛을 흐리게 하거나, 빵을 석탄으로 바꾸거나, 말(言)을 나사로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가련한 시인을 형제들과 지상의 벗들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온갖 그럴듯한 거짓을 말합니다. “당신은 마술사야“ 라고. ”당신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신이야“ 라고. 어떨 때는 시인들도 이런 말을 믿고 왕국을 선사받은 듯 이런 일들을 반복하지요. 진실은, 이 아첨꾼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노래가 전파되는, 시인들의 왕국이 겁나서 빼앗으려는 것입니다. 시를 이렇게 신비화하고 신화로 만들기 때문에, 내가 읽지도 않고 (사실은 혐오하는) 온갖 논문들이 범람하는 것이지요. 음식을 씹어서 다른 사람들이 삼킬 수 있게 만드는 에스키모의 관습을 그들은 기억해 냅니다. 글쎄요, 나는 이론을 씹기를 거부합니다. 그 대신, 내가 대지와 사랑에 빠진 칠레 남부의 적참나무숲이나, 스타킹 공장이나, 망간 광산(그곳 사람들은 나를 잘 알지요), 혹은 튀긴 생선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여 함께 걷고자 합니다.

    자연적인 사람과 인위적인 사람들로, 또는 현실주의자와 몽상가로, 인간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인간인 사람과 인간이 아닌 사람으로 나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인간이 아닌 사람들은 시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적어도 나의 시와는.

    내가 몇 마디를 말하도록 요청받은 이 긴 브라질 탁자의 끝에 서서, 내가 말은 많이 했어도 정작 중요한 것은 말하지 못했음을 압니다. 서문이나 헌정을 쓰는 것을 항상 주저하지만 이번에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시적이며 흙냄새 나는 강렬한 나라 브라질에 끌렸기 때문입니다.

    (칠레인들이 말하듯) 일 년 13개월 동안 도시와 산과 길에 내려, 태평양 군도를 적시고 고독한 파타고니아를 지나 남극에서 얼어붙는 차디찬 비 아래에서 나는 자랐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이 빛나는 나라, 미대륙 지도에서 날개를 폈다 접었다 하는 영원한 푸른 나비와 같은 나라가 나를 매혹하였고 설레게 하였으며, 그 신비한 매력의 근원을 찾아나서게 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그 땅의 상냥하고 우애 넘치는 강한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 내 가슴은 완성되었습니다.

    이 나라와 그 사람들에게 이 시들을 사랑으로 바칩니다. (파블로 네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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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에 출간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포르투갈어 번역본의 서문

     

     

     

     

    문득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파블로 네루다의 글이다.

    네루다가 조국과 고향을 등지고 이탈리아에서 망명생활 할 때,

    어느 우편배달부와의 만남과 인연을 그린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해 저마다 각각의 느낌을 가질 수 있겠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詩란 누구나 쓸 수 있고, 누구든 詩人이 될 수 있구나 하는 것.

    꼭 무슨 특별한 재능이라든가 교육 등 배경을 가져야만

    시인이 되고 시를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無學의 한 시골 우편배달부가 네루다라는 대시인의 집에 배달을 가면서

    네루다를 만나게 되고, 네루다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세상과 사물, 사람, 그리고 이념에 눈을 뜬다.

    네루다가 무슨 특별한 관심을 갖고 우편배달부를 대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일상적인 대화 그 수준의 것이었다.

    물론 이를 통해 우편배달부는 詩語와 은유 등도 배우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나 네루다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이 우편배달부가 영적이나,

    지적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인간과 사물에 대한 애정이 싹터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면서 이 우편배달부는 시인이 되어간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

    영화 말미에 이 우편배달부는 시인이자 사회주의운동가로 활약타가

    좋지 않은 운명을 맞게되는 것으로 기억된다.

    네루다와의 만남에서 많은 것을 알게됐는데,

    아마도 너무 이념 쪽에 경도됐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네루다 자신이 사회주의자였으니까 그랬을 것이다.

    네루다의 윗글을 읽노라면, 네루다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순박한 우편배달부를 어떤 식으로 대하고 성숙시켜 나갔을까를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

     

    1995년인가,

    칠레를 갔다가 시간을 내어 네루다의 생가를 찾아본 적이 있다.

    산티아고에서 태평양 바다를 옆에 끼고 발파라이소를 지나 수 시간을 달렸는데,

    일정 때문에 기어코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너무 멀기도 했지만, 숙소까지 오는 시간과 또 와서 할 일을 생각하니 갈 수가 없었다.

    대신 그 인근의 한 한적한 어촌에서 잠시 머물었다.

    파란 바다를 바라다 보면서 네루다를 한참 생각했다.

    그 것으로 아쉬움을 대신했던 기억이 새삼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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