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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포트킨(Kropotkin)의 모스크바사람 2020. 6. 3. 10:13
"... 파리로 치면 생제르망에 해당되는 스타라야 코뉴세나야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조용하고 평화스럽게 보였다. 아침나절에는 아무도 거리에 나타나지 않았고, 한낮이 되어서야 아이들이 프랑스인 가정교사나 독일인 보모를 따라 눈쌓인 가로수 길로 산책을 나오곤 했다. 오후가 되면 부인들이 두 마리의 개가 끄는 썰매를 타고
- 설매 위에는 하인 한명이 좁은 판지 위에 올라선 채 - 외출하는 것이 보인다. 혹은 부인들이 커다란 활모양의 스프링이 달린 구식 四頭마차를 타고 앞에는 한명의 마부, 뒤에는 두명의 하인을 데리고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밤이 되면 집들은 불빛이 휘황찬란했고 창문도 닫지 않았기 때문에 응접실에서 카드놀이를 하거나 왈츠를 추고있는 모습이 길가에서도 보였다." (표토르 크로포트킨)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 1842-1921)이 나서 유년과 성장기를 보낸 모스크바는 그의 문학적 소양과 학문, 그리고 지식의 창고였다. 크로포트킨이 회고록에서 묘사한 제정러시아 말기 모스크바의 한 풍경은 흡사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그는 제정러시아 구 귀족들이 모여살던 스타라야 코슈세나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크로포트킨의 러시아는 참으로 목가적이다. 목가적 러시아에 대한 사랑. 그로부터 그의 붉은 혁명사상이 잉태된 것은 일말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러시아에게서는 회색빛 혁명의 칙칙한 그림자가 없다. 크로포트킨은 1906년 41년만에 귀국해 모스크바 근교 드미트로포에 칩거한다.
그 곳에서 결국 미완의 대작이 된 '윤리학'을 집필하다가 운명한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 노구를 이끌고 윤리학을 테마로 집필에 몰두한 점은, 크로포트킨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민에 대한 따뜻한 시선, 평등과 인권, 윤리를 기본으로 한 인민민주주의를 강렬히 추구한 그의 지향점은 결국 아나키즘이었다.
"인민들을 권위주의로 대한다면 거기에 자유는 없는 것이다(Where there is authority, there is no free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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