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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김치가 풍성하다. 밥 먹을 때 어떤 김치를 먹을까 망설여질 정도다.
김장철, 이 집, 저 집 김치가 많은 탓인데, 아내에게 김치 싸주는 이웃들이 많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김장철이 아닐 때도 그렇다. 아내는 묵은지나 갓김치 등도 곧잘 얻어 와 입을 풍성하게 해 준다.
김치는 오로지 집에서 담근 것만 먹었던, 아니 먹어야 한다던 오래 된 나의 습성과 관점으로 처음엔 이해가 잘 되질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나도 그에 많이 무디어 졌다. 은근히 다른 집 김치를 궁금히 여길 때도 있으니 말이다.
집에 이 집, 저 집 김치가 많으니 이런 문제가 있다. 우리 집 김치에 대한 정체성이 뭔가를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아내는 서울사람이다. 경상도 출신인 나와는 미각적인 측면에서 많이 달랐다. 김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거의 일치를 이뤘다.
일치된 김치 맛은 나의 어머니가 담근 것이다. 아내가 어머니의 그 맛을 나름 전수하여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기에 김치와 그 맛에 관해 아내에게 그리 큰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나이들어 이웃 집 김치 맛에 길 들여지면서 정작 우리 집 김치에 대한 정체성에 혼란이 오고있는 것이다.
우리 집 김치가 맵다, 맵지 않았던가도 잘 모르겠다.
이제는 연로하신 어머니가 음식에 일절 관여하지 않으면서, 아내도 어머니의 그 맛을 잊어가고 있을 개연성도 물론 있을 것이다.
올해 아내는 웬 심산인지 김장을 통크게 하려했던 것 같다. 절인 배추를 40포기나 장만한 것이다.
그러다가 막상 김장하는 날, 아내는 후회하고 있었다.
둘이 먹을 김장을 40포기 씩이나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문제도 그렇지만, 혼자서 그 양을 하기에는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20포기만 했다. 그렇다고 20포기는 버릴 수가 없어 좀 손 쉽다는 서울식 백김치를 담궜다.
그러니 결론적으로는 40포기를 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아내가 담근 올해 김장김치 맛을 나는 지금껏 모른다. 아직 익지않아 먹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장 이후 이제껏 겉절이와 겨우 맛이 든 백김치만 먹었다.
그런데 어제 아침 아내 혼자 먹는 밥상에 맛있게 보이는 김치가 보였다. 양념이 발갛고 진하게 보이는 게 맵쌀한 맛이 풍겨지는 김치다.
나는 아, 저게 우리 집 김장김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기대감이 솟구쳤다.
“그 김치, 우리 김장김치구나 맛제?”
“아니”
“그라모 무슨 김치?”
“아, 이거 밀양 아줌마 김장하고 준 김치야. 맛있다”
밀양 아줌마는 아내와 친한 경상도 밀양 아주머니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