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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년 만의 신림 땅 '용소막 성당'
    추억 속으로 2021. 6. 27. 07:18

    원주 신림의 용소막 성당. 2011년 와 봤으니까 10년 만의 발길이다.

    오기가 쉽지 않았다. 중앙선 신림 역이 폐쇄된 탓이다.

    고양에서 버스를 타고 원주터미널에 내려서도 두 번 버스를 갈아타고 도착할 수 있었다.

    금대리, 치악재 등 원주에서 용소막 성당 가는 길, 풍광은 예전 그대로인데도,

    예전에 가던 그 맛이 나질 않았다. 아무래도 연륜과 나이 탓일 것이다.

    1980년대 초, 여기를 자주 왔었다.

    장모님의 몸이 안 좋았다. 장인 어른이 어디 요양할 데를 구하다가 찾은 곳이 신림 땅이다.

    그곳의 한 농가를 세로 구입했다. 윗채와 아랫채가 있는 자그마한 시골 촌집이었다.

    윗채를 쓰고 아랫채는 집을 관리할 젊은 부부가 살았다.

    장인께서 신림을 요양처로 구한 것은 장모님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그 곳에 있는 용소막 성당 때문이었다. 병이 심각헸던 장모님은 그곳에 있고싶다고 했다.

    나는 그 때 용소막 성당을 처음 봤다. 명동성당의 축소판 같았는데,

    이국적이면서도 중세풍의 다소곳한 분위기가 좋았다.

    물론 그 때, 아니 10년 전과도 많이 변했다.

    100년이 훨씬 넘은 성당은 원래 그대로이지만, 여러 부속건물들이 많이 생겼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도 예전과 달리 잘 정리해 놓았다.

    이 성당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를 소개하는 석물과 유물관도 처음 대했다.

     

    성당 옆 오래된 노거수인 느티나무는 옛 그대로다.

    그 곁의 여러 조성물들도 나에게는 새로운 것들이다.

    성당에서 바라다 뵈는 풍경들도 예전같지 않다.

    치악산의 여러 연봉들이 예전에는 아주 강렬하고 날카롭게 느껴졌는데,

    아주 부드러운 모습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도 그 한 느낌이다.

    장모님은 그 때 성당에 오르간을 한대 기증하셨다. 그리고 그 곳에 머무를 때면 오르간을 연주했다.

    미사시간에도 연주했고, 그냥 한가한 시간에도 오르간과 있는 시간이 많았다.

    한갖진 오후, 느티나무 아래에 앉았노라면 들려오던,

    장모님이 연주하던 그레고리안 찬트의 청아한 선율이 들려오곤 했다.

    용소막 성당의 본당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코로나 때문이다.

    입구의 조그만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제단 오른 쪽에 오르간이 보인다. 장모님이 그 때 기증한 그 오르간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멀리 보여도 뭔가 눈에 익은 느낌이 온다.

    그 때 그레고리안 챈트의 선율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신림 땅, 그리고 용소막 성당으로 인해 나는 치악산과 인연을 맺는다.

    그 곳을 말하자면 베이스 캠프로해서 종주 등반을 즐겼다.

    지금 마흔 나이의 큰 아이가 서너살 쯤 됐을까, 그 어린 아이를 데불고 껌껌한 밤,

    신림역에 내려 어둔 밤길로 농막을 찾아가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 신림 역도 이미 폐쇄됐고, 이제는 그 흔적만 남았다.

    예전 장모님이 기거하던 초가집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신림 역 옛 길을 기점으로 다만 짐작만 할 뿐이다.

    장모님은 그 어려운 암을 극복하시고 지금 건강하게 살고 계신다.

    지금도 가끔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하고 무너져내린다. 수술침대에 실려나오던 장모님.

    다리 한 쪽이 움푹 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인의 그 참담해하던 표정.

    장인은 장모님을 살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용소막 성당은 그 한 흔적이다.

    시한부 생을 장모님을 그곳에서 마무리하려 했던 것이다.

    장인은 동성학교, 그러니까 천주교 소신학교를 나오셨다. 집안이 다 그러했다.

    그러던 장인은 내가 결혼해서 보니까, 그 때는 카톨릭과 멀어져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나는 좀 의아스러웠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런 장인이 장모님을 위해 용소막 성당 인근에 거처를 마련하신 것은 오로지 장모님을 위한 것이었다.

    장모님은 투병과정에서 카톨릭 성지인 프랑스 루르드의 물을 많이 마셨다.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때다.

    장모님이 명동성당의 어느 수녀님으로부터 한 방울 그 물을 마신 뒤로 통증이 가라앉는다는

    말에 애를 써서 그 물을 구해 마시게 했다. 장모님은 그렇게 그렇게 해서 골육종을 극복했다.

    나는 장인어른이 장모님으로 인해 카톨릭으로 다시 돌아오신 것으로 믿고있다. 

    그러던 장인이었지만, 정작 장모님보다 먼저 1992년 세상을 뜨셨다.

    어제 용소막 성당에서 장인어른 생각이 많이 났다. 성모마리아에게 장인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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