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馬山의 '명歌手'들
    내 고향 馬山 2021. 12. 22. 10:40

    "오동추야 달이밝아/오동동이냐..."로 시작되는 '오동동타령'은 1950년대 마산의 멋과 풍류를 대표하는 대중가요다. 6.25전쟁의 상흔으로 음울하던 당시, 밝고 신나는 민요풍의 이 노래는 전 국민의 시름을 달래며 전국적으로 선풍을 일으켜 마산을 전국적으로 크게 알리는 계기로도 작용한다.

    이 노래 글을 지은 여인초도, 곡을 만든 한복남도, 노래를 부른 황정자도 마산 사람은 아니지만, 이 노래 하나로 마산과 연을 맺고 우리나라 가요사에 짙은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다. 이 노래는 제목 그대로 마산의 낭만과 멋이 가득 담긴 노래지만, 이와 더불어 마산 출신으로 우리나라 대중가요 에 이름을 남긴 예인들도 꽤 있다.

    반야월(1917-2012)은 새삼 설명이 필요없는, 우리나라 가요사에 이름을 떨친 작사가요, 작곡가요 가수다. 그가 평생 만든 노래가 무려 5,000여곡인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한 개인이 만든 최고로 많은 수의 노래이고 앞으로도 이 기록이 깨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울고넘는 박달재' '찔레꽃' '이별의 미아리고개' '산장의 여인' '소양강 처녀' 등 그의 대표적은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 노래들을 포함해 반야월의 인기곡들은 대부분 그가 노래글을 지은, 말하자면 작사로 대표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반야월은 작사에 앞서 원래 가수로 데뷔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산 반월동 태생인 그는 1937년 조선일보와 태평레코드사가 공동주최한 전국가요음악콩쿨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며 화려한 데뷔를 한다. 반야월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1940년 부른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노래 때문이다.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불효를 하소하고 있는 이 노래는 조선 천지를 울렸고, 이 노래 하나로 반야월은 단번에 최고가수의 반열에 오른다.

    이 노래에는 반야월 자신의 슬픈 사연이 담겨있어 더욱 심금을 울렸다. 청운의 꿈을 안고 비내리는 항도 마산을 우산도 없이 떠나던 날, 어머니는 먼 발치에서 하염없이 울며 손을 내 젖는다. 부디 성공하거라. 어머니를 항상 그리며 성공을 위해 절치부심하던 그에게 이 곡이 들어왔다. 노래 취입을 위해 일본 오사카로 가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 전보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친 별세.' 찢어지는 가슴으로 통곡하듯 부른 노래가 바로 '불효자는 웁니다'이다.

    '산장의 여인'은 그가 1951년 마산방송국 문예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가포 결핵요양소에 위문공연을 갔다가 우연히 마주 친, 죽음에 직면한 어느 여인의 애틋한 운명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써 내려간 노래다. "무학산 말바위에 전설이 자고/장군내 실개천에 가재가 울던..."으로 시작되는 '내 고향 마산항'은 고향 마산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있는 노래지만, 그 바탕은 역시 어머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무덤이 말바위 부근에 있었고, 말바위를 생각하면 고향과 함께 어머니가 떠올려지면서 만들어지게 된 노래라는 게 생전에 그가 들려준 얘기다.

    반야월과 비슷한 시기에 가요계에 데뷔해 '아리랑 술집' '깨어진 단심' 등을 불러 크게 히트시킨 김봉명(金鳳鳴, 1917-2005)도 석전동 출신의 마산사람이다. 1938년 대구에서 개최된 신인콩쿠르에서 입상한 김봉명은 이듬 해 '깨어진 단심'을 데뷔곡으로 낸데 이어 '아리랑 술집'을 발표하면서 가요계 정상에 선다.

    김봉명의 아내인 김미라, 동생 김용대도 빼어난 가수로, 이들 가족이 함께 출연한 악극 '울며헤진 부산港'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

    "낮 설은 타향땅에/외로운 저 달아/그리운 부모형제/너 만은 보았겠지..." 1960년대를 살았던 마산사람이라면 이 노래 가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김철이라는 가수가 부른 '향수에 젖어'라는 노래다. 당시 마산에 살던 김철은 이 노래 한곡으로 단번에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고 유명세를 탔다. 마산에서는 당시 라디오만 켜면 이 노래가 나올 정도로 그 인기는 대단했고, 무학국민학교에서 곧잘 열리곤 하던 노래자랑대회에서는 이 노래가 단골 메뉴였을 정도로 널리 불리어져 노래를 부른 김철이 마산사람이라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김철이 마산에서 박일남. 진송남. 후랑크백 등 당시 인기가수들과 가지곤 했던 '쇼' 공연은 인파로 넘쳐났다.

    그러나 김철의 가수로서의 수명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향수에 젖어'의 인기 여세로 부른 후속곡 '내 이름을 묻지마라'가 어느 정도의 인기를 얻었지만 그 후 노래들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김철은 그 후 재기를 노렸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가수를 접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근황이 잡힌 것은 지난 2012년 10월이다. 김철은 마산 인근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김철의 노래에 열광했던 한 팬이 어떻게 어떻게 해 찾아가 만난 소식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것이다.

    김철의 인기가 사그라질 무렵, 그 바통을 이어받아 등장한 가수가 이학춘이 아닌가 싶다. 자산동에서 태어난 이학춘은 저음의 허스키한 보이스가 매력적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어떤 노래든 소화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가수였다. 이학춘이 가수로 정식 데뷔하기 전 잘 부른 노래가 오기택의 '우중의 여인'이다. 그는 1960년대 말 무학국민학교에서 열린 노래자랑대회에서 이 노래로 단번에 인기몰이를 하면서 가수로 나선다.

    그가 서울 모 레코드사의 전속가수로서 1970년에 발표한 노래가 '괴로워도 웃으며'이다. 애잔함을 담은 굵직한 저음의 이 노래는 발표되면서 남쪽 마산으로부터 서서이 인기를 탄다. 마산출신이었기에 마산에서는 그에 대한 기대가 있었지만, 노래가 좋았고 특히 이학춘의 저음의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이 노래는 마산발 인기몰이를 바탕으로 전국적인 인기차트에 오르면서 이학춘의 이름을 인기가수 리스트에 올려지게 한다.

    "그대가 날 버렸나/내가 그대를 버렸나요..."로 시작되는 이 노래의 인기는 라나에로스프의 한민이 그 후 '어차피 떠난 사람'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하면서 다시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여파가 강했다. 이학춘은 '괴로워도 웃으며' 발표 후 '이별의 영시' '어머님' 등 후속곡을 발표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벌여 나갔으나, 역시 데뷔곡만한 노래들은 내놓지 못하면서 좋지 못한 결말을 맞게 된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관리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소리가 나온다. 이학춘이 한창 날릴 무렵인 1970년대 초, 그를 경부선 열차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식당차를 오가며 엉망으로 취해 횡설수설하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그는 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그에 대한 소식을 궁금해오던 차에 뜻밖에 2015년 7월경 마산의 어느 주점에서 그의 얘기를 들었다. 덧붙여 이학춘이 자산동의 좋은 집안 출신이었고, 그의 형이 이름만 대면 잘 아는 외국주재 대사출신의 외교관이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1970년대 초는 이른바 통기타 문화의 시대였다. 이런 현상은 전국적인 것이었고, 마산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마산여고에 노래를 잘 부르는 학생이 둘 있었다. 하나가 예명 유가화로 잘 알려진 박미영이었고, 또 하나가 정태춘과 짝을 이룬 듀오로 우리나라 가요의 격을 높인 박은옥이다. 이 둘은 그 무렵 마산의 학생들 간에서는 노래 잘 부르는 통기타가수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이 둘의 재주를 지켜보면서 어느 정도 지도의 수준에서 영향을 준 사람이 '너'로 유명한 가수 이종용이다.

    이종용은 그 때 마산의 39사단 군종부에 있으면서 마산의 각급 단체 등에 나가 싱얼롱과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유가화와 박은옥도 어떤 때는 함께 하기도 했다. 둘은 또 가포 결핵요양원 등에 가 위문공연을 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가화와 박은옥이 가수로서 데뷔한 것은 비슷한 시기인 1979년 경이다. 박은옥은 가수 최백호의 권유와 추천으로 서울의 레코드사를 찾았고, 유가화는 부산에서 활동하다 1979년 당시 동양방송(TBC) 신인가요제에 나감으로써 그 계기가 마련된다.

    박은옥은 1979년 '회상'으로 단번에 가요계의 주목을 끈다. 청아하면서도 따뜻한 목소리의 애잔한 이 노래는 좋은 노랫말을 바탕으로 전달성이 강하다는 평가를 얻었던, 이즈음에도 많이 듣게되는 명곡이다. 이 노래는 박은옥의 평생 반려인 정태춘은 만나게 되는 고리로도 작용한다. 박은옥보다 한 해전인 1978년 '시인의 마을'로 데뷔한 정태춘은 같은 레코드사에서 박은옥이 부른 이 노래를 접하게 되었고, 박은옥의 음악성과 사람됨에 반하게 되면서 자신의 곡을 박은옥에게 선뜻 준다. 둘은 그렇게 해서 1980년 5월에 결혼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9년 TBC 신인가요제에 나간 유가화가 그 무대에서 부른 노래가 그녀의 지금껏 대표곡인 '나도 모르게'였고, 이 노래로 신인상을 수상한다. 이 노래는 그 이듬해 각종 인기가요 차트 1위에 오르면서 유가화로 하여금 KBS가요 신인상을 받게 한다. 그만큼 노래도 좋았지만, 호소력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절창이었다. 노래도 노래지만, '가화'라는 이름이 좀 독특해 관심을 끌었다. 가화는 고구려장수 연개소문의 딸 이름이다. 가화라는 이름을 내건 다방이 명동 구 외무부 부근에 있던 시절이다.

    유가화가 '나도 모르게'라는 노래의 분위기로 계속 매진했다면, 그의 운명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유가화는 하지만 그 노래 하나로 서서이 지쳐갔다. 어느 자리에서건 그 노래만 주문했고 또 불러야 했다. 유가화는 이에 환멸을 느낀다. 홀연히 방송무대를 떠났고, 이후 이태원 언더그라운드 무대에서 강렬한 노래를 불렀다. 당시 유가화는 기존의 창법에서 벗어나 1970년대 사이키델릭 사운드 그룹의 그레이스 슬릭이나 재니스 조플린 같은 강력한 포스의 음색을 구가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목에 탈이 난다. 회복 후 1988년과 2013년 각각 새 앨범을 내고 재기에 나섰지만 예전같이 않았다.

    유가화는 몇년 전 6월 서울 대학로에서 컴백 콘서트를 가졌었다. 그러나 그 후 활동은 뜸한 상태다.

    박은옥은 2004년 정태춘과 함께 장기 콘서트를 가진 이래 5년간 공연을 포함해 외부활동을 자제하고 살았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시절이 어떻했던 가로 음유시인풍의 이 둘에 대한 침묵을 읽어봐야 할 것이다. 2009년에 그들은 데뷔 30주년을 맞아 여러 작업을 벌인다. 공연도 하고 미술과 사진, 그리고 출판전시회도 겻들이는데, 이 작업에 가수 강산에, 영화배우 권해효, 작가 이외수 등이 공동으로 참여한 것이 이채롭다. 박은옥과 정태춘은 2012년 조용하고 잘 알려지지 않게 한장의 음반을 낸다. '서울역 이씨'와 '저녁 숲 고래여'가 타이틀 곡이다.

    박은옥과 유가화와 같은 또래로, 같이들 마산과 부산에서 활동하다 후에 가수가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경이다. 그도 박은옥. 유가화와 함께 이종용이를 만나 음악을 배우고 지도를 받았다. 박경 역시 통기타가수로 출발했지만, 음악을 하는 과정에서 언더그라운드 음악에 빠져들었고, '들국화'의 전인권, 하덕규 등의 뮤지션들과 친교를 가지면서 서울에서 데뷔를 한다.

    그가 부른 노래는 얼마 안 된다. '울면 안돼' '새벽' 등 몇 곡인데, 이 노래들은 지금도 많이 불리어지고 있다. 음악성과 특히 보칼리티가 뛰어나 "동양에서는 나올 수 없는 목소리"를 가진 가수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박경도 자기관리에 부실한 측면이 있다. 기행을 일삼기도 했고, 술을 즐겨 했다. 하는 음악의 속성이 그랬는지는 몰라도 히피풍의 생활에 젖어들기도 했다. 1990년대 말 경기도 일산 장항동에 목조로 된 카페를 열고 술을 팔면서 라이브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그 얼마 후 간경화로 세상을 떴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