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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창동 '음악의 집'과 조남륭 兄
    내 고향 馬山 2022. 2. 12. 18:51

    1970년대 초는 한창 압축 성장을 위한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다모두들 경제성장이라는 슬로건 아래  먹고  살아야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들 일했다마산도 예외가 아니다수출자유지역과 함께 공업발전을 기치로 창원공업단지가 조성되던 때다이런 급속한 산업화는 사람들 마음의 여유를 잃게 하는 측면이 있다바쁘게 살아가다 문득 한숨 돌려 뒤돌아봤을  몸과 마음을 위무할 공간이 그래서 필요하게 된다.

     

    마산은 전통적으로 '주도(酒都)'라는 이름에 걸맞게 술집이 많은 도시다나이   대한민국의 사람들이  아는 '오동동 타령'이라는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이 이를 뒷받침한다그러나 오동동을 비롯한 마산 도심의 당시 술집들은 나이  들고 돈께나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던가 싶다물론 젊은 사람들이 가는 술집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이쯤의 취향에 맞는 술집이 도심에 있었는지는 기억에 별로 없다

     

     마실 돈도 없었고그저 만만했던  남성동 선창가의 바닷가에 반쯤 걸쳐져 얼기설기 늘어서있던 포장 술집이었고여기에 젊은이들이 많이 몰려 마셨다 포장술집들이 있던 곳을 '홍콩빠'라고 불렀는데그렇게 이름 지어진 연유는  책의 별도의 글에서 언급하고 있.

     

    당시 마산에는 특히 젊은이들 가운데 학식께나 있는 대학생들이 가서 마실만한 술집이 마땅찮았다암울한 군사독재시절사회흐름과 지식에 대한 호기심과 욕구가 한창 왕성할 시기인 이들이 서로끼리혹은 선배들을 만나 인생과 철학문학과 예술을 논하면서 한잔 술을 나누는 것은 어쩌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에 다름이 아닐지도 모른다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젊은 청년학생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술집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적일 것이다바로 조남륭의 '음악의 ' 이런 측면에 맞닿아 있다.

     

     필연의  가운데 누구보다 음악과 문학을 좋아하고 젊은 청년학생과 지식인들을 아꼈던 조남륭이 있었던 것이고그래서 마산 창동의 '음악의 하면 조남륭이고조남륭하면 '음악의 '이라는 연상관계가 당시 마산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물론 지금은 '음악의 ' 없다그러나 조남륭은 이제 80 나이지만 아직도 창동 뒷골목에서  끄트머리를 놓지 않고 있다.

     

     

    (1975년경 창동 '음악의 집.' 왼쪽이 조남륭. 가운데가 화가였던 김정권. 벽면의 그림은 모두 그가 그린 것이다.)

     

     

     

    조남륭이 북마산의  문창교회 뒷골목으로 흘러들어 간판도 없는 클래식음악 전문의 주막을   1971년이다그는 원래 마산사람이 아니다경기도 출신인 조남륭은 6.25사변  부산으로 피난 내려왔다가 어떤 계기로 마산에 정착한다

    "외가가 의령에 있었는데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모시기 위해 그곳에 갔다가 마누라(엄학자) 만나 결혼했지그렇게 살다 어르신들이 돌아가시자 마산으로 들어왔지."

     

    마산에서 클래식음악을 틀어주는 주막을  것은 물론 호구지책의 일환이지만  기이하다내남없이 어려웠던 시절뭐라도 해야 먹고   있는 처지라 가릴  없을 것이지만  하필 클래식음악 전문의 술집이었을까이는 음악과 문학을 좋아하는 조남륭의 로맨티스트적인 취향을 빼놓고는 설명할  없는 대목이다. 6.25사변을 전후해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다녔던 그는 학창시절부터 클래식에 매료된다 어렵던 부산 피난시절에도 그를 달래줄  있었던 것은 클래식음악이었다.

     

    "클래식음악이 좋았어 험한 시절싸우지 않고는  견딜  음악이 곁에 있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악인이 됐을지도 모르지광복동 아폴로와 칸타빌레 음악실미화당 음악궁전부평동 오아시스  정말 많이 다녔지."

     

    이런 취향을 바탕으로 간판도 없이  골목집 주막은 초라했다외형상 그랬다탁자  두개에 두부를 안주로  막걸리를 내놓는데 불과했다 그러나 내용은 풍성하고 넉넉했다항상 틀어  놓는 클래식음악 때문이다울려나오는 음악 때문에 '베토벤 ' '음악의 '으로 드나들던 사람들에게 회자되다가 어느 시점인가 '음악의 '으로 정착하게 된다당시 새어 나오는 음악을 듣고  집을 찾아들어가 단골이  사람들도 많은데주로 대학생들이었다.

     

    서울로 유학  학생들이 방학이면 내려온다앞서 언급했지만당시 대학생들로서는 이런 공간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대학생이 요즘처럼 넘쳐 흘러나던 시대가 아니다대학진학률이 높지  않아  단위에서 몇몇 정도의 대학생이 있을 시기다자연히 대학생들은 자부심이 강했고새로운 문화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그런 문화가 사회를 계몽해야한다는 인식들이 있었다.

     

    조남륭의 '음악의 ' 청년대학생들의 이런 생각과 문화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기에 알맞은 공간이었던 것이다밤이면 시벨리우스와 스메타나의 음악이 흘러 넘쳤다청년학생들은 막걸리를 마시며 철학과 문화그리고 정치에 대한 생각들을 털어놓고 토론하면서 음악에 젖었고 조남륭은 이런 북적거리는 광경을 즐기면서 함께 마시고 함께 토론했다.

     

     

     

     

    '음악의 ' 1973 창동 불종거리 코아 맞은   삼성약국  목조건물 2( 만미정 자리)으로 가게를 옮긴다아마  무렵이 '음악의 전성시대가 아닌가 싶다청년학생들은 물론이고 마산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들락거린다지금은 고인이  조두남정진업안윤봉박재호최운김봉천안병억이선관  마산의 내로라하는 문화계 인사들이 단골이었다당시 경남대에 출강하던 구상 시인도 즐겨 드나들었다군복무 중이었던 이성복 시인도 단골이었다.'음악의 ' 마산사람들만 찾는 곳이 아니었다.

     

    마산의 재경대학생들 간에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다른 지역의 학생들도 많이 찾는다특히 운동권학생들이  집을 많이 찾았다유신독재시절마산은 운동권학생들이 선호하는 일종의 '도피처역할을 했다. 3.15의거라는 민주항쟁의 본거지라는 역사적인 의미에다당시 핵심 운동권학생들 가운데 몇몇이 마산출신이라는 점도 작용한다이와 함께 '오' 김지하 시인이 가포결핵요양소에 연금된 사실도 그에  궤를 보태는 요인이 된다 시인은 당시 그의 말대로 요양소 '월담'  했다그리고는 마산으로 나와 후배들과 만났다 장소 가운데 물론 '음악의 ' 있고, '홍콩빠' 있다서강대 S 교수부산대 C 명예교수 등도 당시 마산에서 '음악의 ' 한번쯤은 드나들었을 운동권 핵심학생들이다수필가 김소운 선생의 아들인 김인범도 있다.

     

     시절의 '음악의 '하면 우선 생각나는  삐걱 소리 나는 나무계단이다 소리가 알맞게 새어 나오는 음악소리와 앙상블을 이룬다고나할까문을 열어 들어가면 뿌연 담배연기 속에 오른  검은 벽을 가리는 그림이 있다헤르베르트  카라얀의 지휘하는 모습이다 있다베토벤이다베토벤이 악보와 함께 '하일리겐슈타트의 편지'  부분과 함께 있는 모습이다.

     

    음악을 틀어주는 음악실은 출입문 맞은편이다투명유리 안쪽으로 클래식 LP판이 빽빽하게 들어찬  보이고 턴테이블 위로 판이 돌아간다음악실 출입은 제한이 없었던  같다다들 알고지내는 사이라 그랬던  같은데누구든 듣고 싶은 음악이 있으면 들어가 틀고 듣는다그들 가운데 유독 음악실을  것인  드나들던  친구가 있다고려대를 다니다 방위근무를 하고 있던 친구였는데지금도 그는 자기가 '음악의 유일의 디스크자키였음을 자부하고 있다 시절드나들던 단골들 가운데 조남륭이 아끼던 후배가 있었다이선관 시인이다지난 2009 타계해 지금은 '창동허새비' 마산 문화계에서 기리고 있는 마산의 저항시인이다선천성 뇌성마비로 거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이선관을 조남륭은 많이 살피고 보살폈다그를 결혼시킨 것도 조남륭이다이선관이 마음에 두고 있던 여인이 있었는데 이상 진척(?)   되고 있었다.

     

    어느 조남륭은 자기 집을 비워준다둘이 함께 있으면 무슨 사단이라도 벌어지겠지 하는 배려에서다결국 이선관과  여인은 조남륭 집에서 함께 밤을 보낸다사단이 있고 없고는   없으되 하여튼 둘은  얼마  결혼을 한다조남륭에겐 안타까운 기억도 있다이선관이 타계하기 며칠 함께 점심을 하자며 그의 아들을 보낸다그런데 마침 밥을 이미 먹었던 조남륭은 "너거끼리 묵어라" 가지 않았는데 며칠  이선관은 세상을  것이다.

     

    이런 전성기 시절조남륭의 '음악의 ' 장사가  됐다종업원 몇을  정도였고 돈도  벌었다그러나 돈이 쌍이지는 않았다조남륭의 돈에 집착하지 못하는 천성 탓이다. " 있어도 쓸데가 없었다"  조남륭의 얘기다돈이 벌렸지만 쌓이지 않는 이유는 조남륭의 그런 천성에다 희한한 술값 계산법도 일조한다.

      

    그는 돈이 없는 손님에게는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있으면 있는 대로 내고 없으면 그냥 가도 된다는 계산법이다. "가난한 예인들이 무슨 돈이 있겠는가그래서 예술 하는 너거들  없어도 한번 실컷 먹고 마셔봐라"하는 심정으로 가계를 했다는  조남륭의 회상이다. '음악의 ' 시인과 음악가화가교수  가난한 문인과 예인학자들이 유독 많이 몰려들었던 이유가 분위기도 물론 그랬지만가난한 문인과 예인을 아끼는 조남륭의 로맨티스트로서의 기질 때문이었다는 얘기로 귀착될  있을  같다.

     

    그는 돈에 집착하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없었는지도 모른다돈이 조금 모이면 나눠주고 갈라주기에 바빴다는  그를 아는 지인들의 전언이다특히 그의 도움을 받은 학생들이  있다돈이 없어 등록금을  내면 대신 내주고서울  차비가 없으면 차비도 주고 생활비도 대줬다돈이 수중에 없으면 신고 있던 구두도 벗어줬다는 웃지   얘기도 있다부창부수랄까조남륭의 부인 엄학자 또한  많기로 유명했다이미 문을 나선 사람을 뒤쫓아 가서 차비를 쥐어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당시  부부는 '가난한 학생과 예술인들의 부모'와도 같았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이런 조남륭에게 불운이 온다.  '음악의 창동시절의 막이 내리는 것이다. 1977 건물 주인이 장사  되는  알고서는 가게를  달라  것이다 수가 없었다창동 목조건물의  가게를 비워주고  중앙극장 인근으로 옮긴다그러나 창동시절의 '음악의 ' 아니었다시기적으로도 창동시절 들락거리던 많은 단골 학생들이 대부분 사회로 나오면서 발길이 뜸해졌고 그들이 주도하던 '음악의 분위기도 사그라져 갔다여기서 조남륭은  재미를  보고 '음악의 간판을 내린다.

     

    '음악의 간판을 내린  조남륭은 80년대를 온전하게 가족을 위해 살았다아이들 공부시키고 가정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해본 일이 없다하숙집도 해보고 구둣방도  봤다늦은 나이에 월급쟁이 회사원생활도 한다그러나 그의 천성이 어딜 가겠는가그를 다시 '음악의 '으로 돌이켜 세운 것은 1980년대 후반이다.

     

     

    (2014년 9월 창동 '만초'에서의 조남륭. 엄학자 내외)

     

     

     

    알고 지내던 후배의 권유로  후배가 하던 실비주점을 하게 된다 집이 지금의 '만초'창동 불종거리 코아 건너편 골목에 있다 실비집의 분위기도  '음악의 그대로지만  같지는 않다조남륭도 아내 엄학자와 함께 늙었고 '음악의 ' 드나들던 사람들도 이미  세상에 많이들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조남륭이 고수하는 것은 클래식 음악이다항상 음악이 흘러나온다 음악 속에서 조남륭은 세상을 보고 세상 사람들을 본다. '만초' '음악의 ' 다르지 않은 것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결코 야박하지 않는 인심과 배려가 있다는 점이다.

     

     

     

     

    차림표도 가격표도 없다 열고 닫는 시간도 달리 없다시도 때도 없이 조남륭이 있고 문이 열려있으면 된다그리고 그저 마신만큼 돈을 내면 된다찾아온 사람이 배가 고프다면 밥을 내주고라면을 끓여주기도 한다그렇다고 밥값을 술값에 포함시키지 않는다같은 차원인지는 몰라도 술값만 받는 것도 특이하다아내인 엄학자가 내놓는 안주는 수수하다두부멸치콩나물 무침이나 생선조림 등이고 감자고구마옥수수 삶은 것도 나온다물론 이들 안주는 공짜다. '만초'에서 술을 마시면서 조남륭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시절의 그가 나온다낭만이 살아있다는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만초' 가면 볼만할   있다.

     

    벽면에 붙여져 있는 사진들이다한쪽 벽면을 빽빽하게 차지하고 있는 수백 장의 사진들은 모두 인물사진이다. '만초' 다녀갔던 사람들인데 중에는 이미 세상을  사람들도 많다언젠가 들렀는데사진을 찍는다얼마  다시 갔더니 찍은 사진이 붙어있다이런 조남륭의 행위 속에 그의 낭만과 사람 좋아하는 성품이 묻어난다추억도 있을 것이다 추억 속에서 조남륭은 1970년대 '음악의 ' 영원히 머물고자하는  같다

     

     

     

     

    (2018년 12월 신장개업한 '만초'에 나와있는 조남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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