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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판이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공 실장은 허리에 차고있는 듯한 그 무엇을 한번 씩 손으로 툭툭 다독거렸다. 윗옷에 덮혀져 불룩하게 보이는 그걸 과시하고자 하는 것일까. 허리에 찬 그 무엇은 의자에 앉은 자세에서는 유난히 불거져 보였다.
"어허, 실장님 그거 권총 아이요? 오늘은 어째 권총까지 차시고..."
안 실장이 공 실장의 허리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실실댄다. 공 실장은 대답대신 씨-익 한번 웃었다. 그리고는 마른 기침으로 "으흠, 으흠"했다. 공 실장은 1970년대 중반 현재 이 지역의 힘센 실력자다. 반공단체 분실장이기 때문이다. 안 실장은 그런 공 실장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나 마찬가지다. 안 실장의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를 알만한 사람들은 잘 안다. 사람들은 안 실장의 그런 처지를 좀 유식한 말로 '레드 컴플렉스', 좀 험한 말로 '빨갱이 콤플렉스'라고들 한다.
지역 신문사의 기획파트 실장으로 있어, 역시 실장으로 호칭되는 안 실장은 신문사 일보다는 공 실장 단체의 반공관련 행사에 더 바쁘다. 빨갱이 물을 먹어 봤기에 그런 행사에는 안성맞춤이다. 그런 모임에서 안 실장은 목이 터져라 반공을 부르짖는다. 신문사에서 어쩌다 쓰는 글도 반공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안 실장을 주변 사람들은 공 실장의 충견 쯤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도 안 실장은자신의 그런 처지조차도 그나마 감지덕지하게 여긴다. 그는 어렵고 험한 시기를 용케도 살아 남았다. 그 과정에서 이런 저런 얘기가 들리지만 어쨌든 그는 전향을 했고 그로써 생명을 부지했다. 표면적으로 공 실장의 역할이 컸다. 공 실장이 보증하지 않았으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공 실장이 허리춤에 찬 것은 권총이었다. 모조품이었던, 아니면 실제 총이였던 간에 하여튼 공 실장은 권총으로 여기고 그걸 차고 나온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공 실장이 술 한잔을 길게 들이킨다. 잔을 놓고 좌중을 휘둘러 보는 눈에 일부러 우락부락한 주름을 짓는 듯 했다. 그리고는 잔뜩 위엄을 갖추고 한 마디 하려 운을 때는 듯 했다.
"요새 시국상황이 어째..."
바로 그 때 안 실장이 공 실장의 말을 가로막고 톡 쏘듯 한 마디 던졌다.
"영판 어네스트 보그나인이네. 진짜로 오늘은..."
머리가 반쯤 벗겨진 공 실장은 눈썹이 유난히 무성하고 검다. 그리고 또한 바짝 치켜 올라간 탓에 헐리웃 배우 어네스트 보그나인을 많이 닮았다. 그래서 공그나인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안 실장의 갑작스러운 그 말에 좌중이 킥킥들 거렸고, 한 말 하려고 잔뜩 폼을 잡았던 공 실장으로서는 김이 샜다.
엉겁결의 상황에서 공 실장이 자세를 추스리려 잠시 뜸을 들이는 사이 안 실장이 그 틈새를 또 파고 든다.
"실장님, 그라지 말고 그 권총 구경이나 좀 합시다. 어떻게 생겼는지 끌러서 한번 보여주소. 사람 죽이는 총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여주면 안 되겠소? 그라고 공그나인 쌍권총 폼 한번 잡아보면 어떻겠소이까, 허허..."
안 실장도 이미 취해 말이 혓바닥을 굴러가는 듯 했다.
공 실장의 얼굴이 불콰해져가고 있었다. 분명 무슨 사단이 일어날 것이다. 좌중은 그런 우려의 분위기로 침묵이 흘렀다. 그 순간 공 실장이 갑자기 일어섰다. 그리고는 웃도리를 확 벗어 제쳤다. 허리에 찬 두툼한 벨트가 드러났고, 과연 오른 쪽에는 권총을 차고 있었다. 권총의 까만 케이스가 백열등 전구 빛에 매끈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래 좋다. 네 하는 짓을 보아하니 간뎅이가 부었구나. 잘 됐다. 내 권총 맛 한번 보여주지."
공 실장은 케이스의 단추를 호기있게 풀었다.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고 시선은 권총으로 향했다. 권총 케이스에서 손아귀에 쥐여진 총이 나오려하고 있었다. 공 실장이 그 상태에서 안 실장보고 외쳤다.
"어이 안 실장, 아니 안 빨갱이, 내 말 잘 들어라. 안 그러면 죽는다. 내가 쏘올 것이다. 빨갱이 심장을 향하 듯 말이다. 그러면 당신은 죽어야 해, 끽 소리 못하고. 알았지!"
권총은 이미 케이스를 나와 공 실장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공 실장은 서부극 속 아란랏드의 폼을 잡는 듯 권총 쥔 팔을 두어 바퀴 돌렸다. 그리고는 안 실장을 겨누었다. 방아쇠를 당겼다.
"빠방! 빠방!"
공 실장이 크게 흉내 총 소리를 냈다. 그 순간이었다. 빠방! 소리와 함께 공 실장을 지켜보던 안 실장이 일어서더니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총 맞은 시늉이었다. 안 실장은 그러면서 뭔가를 외치고 있었다.
"아, 아, 만세, 만세, 만만세!"
안 실장은 그 외침과 함께 술상 위로 엎어졌고 술상은 엉망이 됐다. 그 상태에서도 연신 만세! 만세!하고 있었다. 만세라고 외치는 소리에 공 실장이 멈칫했다.
"어라, 임마 안 실장, 만세라니, 만세는 무슨 만세고, 너 지금 김일성 만세 부르고 있구나, 그렇지?"
안 실장은 엎어진 자세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공 실장을 빤히 쳐다본다. 입가에 흐미한 미소가 머금어지고 있었다.
"실장님, 그거 진짜로 한방 쏴 주소. 진짜로 한 방!"
"진짜로? 그거 참말이가?"
"그렇소. 진짜로. 나는 참말로 죽고 싶소이다."
"이 놈이 미쳤구나. 진짜로 죽고 싶은 모양이네."
"그렇소 진짜로 죽고 싶소. 개차반 같은 이런 인생 살아서 뭐하겠소. 그러니 한 방 진짜로 갈겨주소. 내 고맙게 가리다"
권총을 쥔 공 실장의 손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 발이 나간, 안 실장을 겨눈 총이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것처럼 보였다. 좌중이 술렁거렸다. 저 총이 진짜 권총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 실장은 총을 다 잡는 듯 했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권총을 잡고는 안 실장을 다시 겨누었다.
"빵!"
총구가 번쩍했다. 안 실장 뒤에 놓여진 큰 경대의 거울이 와장창 깨지며 무너져 내렸다. 순식간이었다. 좌중에 비명이 난무했다. 거울은 무너져 내리며 반짝였다. 무수한 거울의 파편들은 흐릿한 백열등 아래 흡사 반짝이는 불빛으로 보였다. 무리지어 흘러내리는 거울조각들 마다에 무수한 불빛들이 불꽃처럼 아롱지고 있었다.
안 실장이 방 안에 낭자한 거울조각들을 똑 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안 실장에게는 무리지어 붉은 빛을 내는 불꽃들이었다. 안 실장이 거울조각들을 한 웅큼 잡고는 공 실장을 보고 외쳤다.
"불꽃, 불꽃이여,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 올라라, 이스크라, 이스크라! 나와 니콜라이 레닌 동지의 이스크라여!"
말이 늘어지고 있었다.
"블.라.디.미.르.일.리.치.율.리.야.노.프.레.닌 동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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