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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에 나타난 '양공주 귀신'writings 2019. 8. 12. 07:41
1970년대 초 서부전선 1사단 소총중대에서 통신병을 하고 있을 때다. 상급부대 등과 교신할 적에는 혼선이 많이 생긴다. 따라서 다른 교신도 듣게 된다. 어느 날 정규교신을 하는데, 연대본부 쪽과 하는 어떤 교신을 듣게 됐다. 그런데 그 내용이 재미있고 충격적이다. 아군 GP에 여자 귀신이 출몰한다는 내용이다. 그 때문에 GP 근무병이나 경계병들이 무서워서 밤이 되면 벙커에서 나가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어느 GP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교신내용을 듣고는 중대장에게 살짝 보고를 했더니, 중대장이 "그럼 그 귀신 잡으러 갈까"라며 대수롭잖게 농담으로 받아 넘겼다.
그 교신을 들은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대대본부에서 비문을 수령한 후 중대본부로 가는 길이었다. 그 때가 6월 초 여름이라 해는 길었다. 대대본부에서 이런 저런 다른 일을 보느라 저녁을 대대에서 먹고 느지막히 길을 나선 터였다. 대대에서 중대까지는 철책선을 따라가는 완만한 길이고 중대본부가 있는 OP로 가는 길은 산길이다. 대대를 나섰을 때는 날이 어둡지는 않았는데, 한참을 가다보니 날이 저물고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어두워지니 마음이 급했다. 물론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기에 길 잃을 염려는 없었다 하지만 날이 어두워져 가니 마음이 좀 불안해지면서 급해지는 것이었다.
저멀리 OP 의 불빛을 바라다보며 철책선을 따라 투벅투벅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뭔가 훅 지나가는 게 있었다. 형체는 알 수 없지만, 그리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DMZ에는 갖은 짐승들이 야생으로 살고 있으니 자주 접한다. 그래서 그저 날짐승이 앞을 지나갔구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얼마 후 또 뭔가가 훅하며 지나간다. 그때부터 이상하게도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날짐승이라도 예사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였는데, 그 생각과 동시에 떠 오르는 게 있었다. 혹시 귀신이 아닌가하는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GP에서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식을 듣지 않았던가. 그게 귀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때부터 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메고 가는 소총을 손에 잡았다. 귀신이고 뭐고 여차하면 총을 쏘자. 그러면 총소리에 귀신이 놀라 도망가든가, 그게 아니더라도 총소리에 비상이 걸리면서 뭔가 시끄러워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다. 방아쇠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다시 조심조심 걸어가고 있는데, 어라 이번에는 눈 앞에서 뭔가 나불거리고 있었다. 허연 물체가 바람에 날리듯 왔다갔다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얼어 붙었다. 총이고 뭐고 쏠 정신도 없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바짝 언채로 서 있었다. 그 상태에서 그래도 앞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물체가 좀 멀어져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사라지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 발짝도 그 자리에서 땔 수가 없었다. 그저 주저앉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근데 그 물체는 사라져가는 게 아니었다. 좀 먼 곳에서 멈추는듯 했다. 그리고는 서서히 아래로 갈아앉아 가더니 어떤 형상으로 변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차마 볼 수가 없어 눈을 감았다. 혼비백산이라는 말은 그 지경에 딱 맞는 말이다. 정신이 가물거려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아, 내 앞에는 하얀 옷을 입은 어떤 여자가 서서 "흑 흑"거리며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사람이 그런 지경에 처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다들 잘 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근데 이상하게도 나는 담대해지기 시작했다. 두 눈에 힘을 주어 그 여자를 똑 바로 주시했다. 여차하면 뭔가 얘기라도 던져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과 함께 내가 엄청 목에 힘을 주어 이렇게 외쳤던 것 같다. "누구냐, 귀신이면 물러가라!" 그렇게 외치고는 나는 주저앉아 정신줄을 놓으며 스러져가고 있었다. 내가 외쳐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 여자 귀신이 뭔가 풀어져 흐물흐물해져가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흐물흐물하게 느껴진 것은 그 귀신이 그렇게 움직인 탓일 거라는 생각이 그 와중에 퍼떡 들었다.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다시 눈을 크게 뜨고 그 귀신을 바라 봤다. 그 귀신과 시선이 마주친다는 두렵고 몸서리쳐지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였을 것이다. 그 귀신이 오른 팔을 들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왼쪽으로 서서히 돌리며 어느 곳을 가리켰다. 철책선 저 저너머의 어떤 곳을, 귀신은 팔을 들어 가리키고 있었다.
부대로 왔을 때, 나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구토에, 웃고 우는 헛소리까지 하고는 벙커 내무반에 꼭꼭 숨어들 듯이 기어들어 가더라는 얘기를 후에 고참으로부터 들었다.
연대본부에서는 GP의 여자귀신 출몰과 관련해 조치를 취했다. 출몰한다는 그 GP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한 것이다. GP를 거의 허물다시피 하면서 인근의 땅을 파고 수색을 했다. 그 결과 놀랄만한 그 무엇이 발견됐다. GP를 서로 연결하는 교통로에서 나무곽이 몇 개 발견된 것인데, 그 안에서 놀랍게도 여자 백골들이 나왔다. 오래 된 백골들이었다. 연대본부에서 그 후 그걸 어떤 후속조치로 처리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들 쉬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해지는 얘기는 이런 것이었다.
그 여자 백골들은 주한미군이 철수하기 전인 1960년대, 미군에 몸을 파는 파주 인근 기지촌의 속칭 '양공주'들이었다. 당시 막 돼먹은 미군들이 그 여자들을 기지촌에서 데리고 놀다가 양에 차지 않을 땐 짚차에 실어 '리비 교'를 건너 GP에까지 데리고 와 논다는 것이다. 그리고 술과 마약에 취한 채 별 짓을 다 하다가 마음에 차지 않으면 그 여자들을 그냥 죽이고는 사체를 GP 인근에 묻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GP에 나타난 귀신들은 말하자면 그때 살해당한 '양공주'들의 혼령이었던 것이다.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그날 밤, 철책선에서 내가 조우한 그 여자귀신과 뭔가 아귀가 맞다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그 철책선 여자귀신이 나타난 시점이 GP 귀신 얘기가 나돌 때 였고, 그 여자귀신이 손을 들어 나 보라며 가리킨 곳이 바로 구체적으로 그 GP 인근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GP에서 나온 백골들을 수습해 잘 장사지낸 후 그 '양공주 귀신'은 사라졌다는 얘기를 후에 전해 들었다. 장마비 내리는 더운 밤, 이 얘기를 쓰면서 비명에 간 그 여자들, 그리고 그 여자귀신이 생각난다. 명복을 빌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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