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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다에서 찬소주를...村 學 究 2019. 12. 22. 17:02
젊었을 적 예전 한 때, 술에 빠져 살면서도 술을 이렇게 마셔봐야지 하는 어떤 로망이 있었다. 추운 겨울 날, 한적한 어촌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며 찬 소주를 마셔보는 것.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사 생각해 보면 그 때 왜 시도 때도 없이 그러고 싶어했는지가 좀 흐릿하나마 느껴지는 것 같다. 좀 엉뚱하기는 하지만, 나름 평소 술을 많이 마신 자신에 대한 일종의 어떤 보속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술로써 헝클어진 내면의 혼돈을 좀 달래고 정리해보고자 하는 욕구가 작용해 그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또한 술을 마신다는 점에서 결국은 술을 마시고자 하는 것에 대한 자기 합리화였을 것이라는 점에서 스스로도 참 치기가 다분한 싱거운 짓거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로망을 다독거리기 위해 혼자서 강원도 묵호 겨울 바닷가를 몇 번 가보기도 했다. 지금은 많이 변했겠지만, 1970년대 묵호 바닷가는 참으로 한적한 어촌이었다. 어판장 인근의 바로 눈 앞에 파도가 일렁이는 주점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찬 소주와 안주라고는 돌소금 딱 하나. 목구녕으로 넘겨지는 시리디 시린 소주에게서는 설익은 포도맛이 난다. 한 병을 비울 때 쯤이면 그 포도맛이 익는다. 그리고 목구녕이 따땃해져 온다. 두 병을 비우고 나면 소주가 물맛이고, 그 때 쯤 바다를 바라다 보면 수평선 위로 갖은 상상이 춤을 춘다. 생각하는대로의 모습이 수평선에 나타난다. 오디세이가 고향을 향해 타고가는 목선도 눈에 일렁인다. 혼자 마시는 술이 이리도 맛 있고 이리도 재미있다고 여겨가며 혼자서 취해가는 것이다. 그 상태로 주점 뒷방에 옮겨져 하루 밤을 묵는다. 다음 날 아침이면 머리와 속이 뻥 뚫린다. 마치 내 몸과 마음에 새 날이 온 것 처럼.
언제나 혼자이지만은 않았다. 언제 쯤부터인가는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 마시기도 했다. 상대가 남자일 수도 있고 드문 경우지만 여자일 때도 있었다. 언젠가 고향의 겨울 바다를 바라보고 마실 적에는 서울에서 마산 인근의 군에 간 연인을 수소문 해 내려온 여자 분이 곁에 있었다. 그렇게 마시자는 나의 제의를 그 분은 선뜻 받아 들였다. 몇몇 해물을 안주로 시키려 했지만 그 분은 돌소금을 줄창 고집했다. 소주는 4홉들이로. 그렇게들 마시고 취하고 노래를 불렀다. "검푸른 바다 위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오, 어디가 뭍이오..." 그 때 마산바다는 검푸렀다. 어두워져 가는 겨울바다는 더 그랬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겨울이 익어가는 이즈음 다시 그러고 싶다. 추운 날, 겨울 찬 바다를 바라보며 시린 소주를 마시는 것. 이제는 로망이 아니다. 조급함이다. 지금 하지 못하면 금생에서는 영영 못할 것 같은 조급함, 그리고 남겨질 아쉬움에서다. 마음이 급해졌다. 그런데 마침 예전에 함께 했던 선배가 울고 싶은데 뺨 때려주는 듯한 연락을 보내왔다.
"김 군, 추운 하루 날 잡아 여수 내려오거라. 선창가 목로주점에 앉아 겨울 바다 보며 대포 한 잔 하자."
그야말로 울고싶은데 뺨 때려주는 격 아닌가. 술이 바뀌었다. 찬 소주에서 끓인 정종 대포로. 그야 주종을 바꾸든가 아니면 냉정종으로 하면 될 일 아닌가. 만사 제쳐놓고 내려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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