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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目拔’ 김형윤 선생과 ‘馬山野話’
    내 고향 馬山 2020. 4. 19. 10:19

    옛 마산을 얘기하고 다룬 근대의 책들은 마산의 오래 된 역사에 비추어 그리 많지 않다. 몇 권이 전해지는데, 공식적인 것으로는 예전부터 마산시에서 발간한 ‘마산市史’라는 게 있고, 개인이 쓴 책들로는 ‘향토마산‘ ’간추린 마산역사‘ ’향토마산의 어제와 오늘‘ ’마산유사‘ '오늘의 마산(1979)' 등이 있다. 이들 마산을 얘기한 책들 가운데 내용적으로 읽을거리가 풍부하고 재미있어 고전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책이 있다. 바로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이 쓴 ’마산야화(馬山野話)‘다. 이 책은 1973년 발간됐는데, 목발선생의 유고집으로 나왔다.

    목발(目拔) 김형윤(1903-1973)선생은 마산에서 태어나 무정부주의와 항일정신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거쳐 향토 마산의 언론인으로 40여 년을 살면서, 마산 지역사회에 커다란 정신문화의 유산을 남겼는데, ‘마산야화’는 이를테면 선생의 이러한 정신적인 요체가 담긴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마산이 개항한 1899년을 전후한 개항시기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전후한 시기까지 마산의 사회상을 목발 특유의 예리한 감각과 풍자적인 필치로 묘사해낸 책으로, 오늘날 마산지역 역사 연구의 길잡이와 지침서가 되고 있다.

    목발은 ‘마산야화’에 앞서 마산일보 사장으로 재직하던 1957년 마산일보를 통해 마산을 소개하기 위한 내용의 ‘약진마산’이라는 책을 출판한다. 마산의 역사와 시정, 산업, 경제, 교육 등 각 분야를 다룬 이 책을 내면서 목발은 “해방 후 향토마산을 소개하기 위한 출판물은 많았지만 종합적인 성격을 발견할 수 없었다”며 “약진하고 있는 마산의 전모를 계통적으로 소개하기 위한 취지에서 출판했다”고 말했다. 이 책은 그러나 ‘마산야화’와는 내용과 취지가 다르다.

    ‘마산야화’는 선생이 급환으로 별세한 1973년 12월에 나왔다. 선생은 마산일보 사장을 그만 둔 후 저술활동에 집중하면서 마산의 역사를 담은 책인 ‘마산시사’ 발간을 준비하는데, 이의 일환으로 1970년 구성한 게 ‘마산시사편찬위원회’다. 이 무렵 선생은 뜻을 함께 한 조병기에게 “우리가 이제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미력이나마 마산사회를 위하여 뭔가를 기여하고 가야하지 않겠느냐”면서 ‘마산시사’ 편찬하는 일을 시작하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이어 1971년 1월에는 마산의 각계 유지들을 대상으로 시사편찬의 취지를 설명하는 모임도 갖는 등 준비 작업에 착수하고 원고 집필에 들어간다.

    그러던 중 1973년 8월 급환으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는데, 사후 그의 서재에서 시사편찬 내용의 육필원고가 발견된다. 장수로는 1천장에 가까웠는데, 목발은 시사편찬을 앞두고 미리부터 원고를 써 왔다는 얘기다. 그러나 목발이 별세하면서 그가 마산을 위해 뭔가 기여하고자 집필했던 이 원고도 묻히게 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목발의 마산사랑을 익히 알고 있는 마산 인사들의 여론이 들끓었다. 목발 원고를 사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었다.

    이런 여론을 바탕으로 그해 9월 20일 마산상공회의소 자료실에서 당시 마산의 문화계 및 언론계인사들인 조병기, 윤희용, 여 진, 정진업, 안윤봉, 이순항, 이정진 등이 모여 ‘김형윤 유고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작업에 착수한 끝에 그 해 12월 책으로 펴낸 게 ‘마산야화’ 이고 ‘김형윤 유고집’이란 부제가 붙었다.

    이 책에서 목발은 마산개항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공간까지 마산을 중심으로 한 정치. 사회상을 자신의 견해를 곁들여 기록하고 비판하고 풍자하고 있다. 굳이 ‘野話’라고 이름 붙인 것은, 팩트를 전제로 한 기록형식의 글이되 딱딱하지 않은 내용으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형식을 취한 역사기록물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하기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산야화’는 모두 141개의 제목을 가진 이야기로 꾸며져 있는데, 첫 에피소드가 ‘수전노 이제’이고 두 번째가 ‘변태성 고리업자’인 것에서 알 수 있듯 비뚤어진 인간과 사회상을 재미있게 풍자하고 비판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예컨대 “마산부내 완월동 2구 전 마산세무서 관사 건너편 골목길을 조금 들어가면 낮으막한 초갓집 부엌방에는 나이 사십이 넘은 일본일 홀아비가 세 들고 있었다”로 시작되는 ‘수전노 이제’는 공무원이면서 조선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면서 수전노 노릇을 일본인이 급성폐렴으로 급사를 했는데, 죽고 난 후 그를 뒤지니 갈 곳 없고 쓸 데 없는 거액의 돈이 발견됐다는 이야기를 재미있는 필치로 비꼬고 있다.

    이 책의 서문은 노산 이은상이 썼다. 노산은 목발과는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동기동창(7회) 간인 것으로 전해지지만 확인은 안 되고 있다. 노산은 서문에서 목발을 “일생을 불우하게 살면서도 낙오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불행을 딛고 일어서 세상과 불의에 항쟁함으로써 낭만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향기와 섬광을 잃지 않았던...”운운으로 목발을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목발은 생전에 노산을 그 연유는 알 수 없으나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마산야화’는 300부를 발행해 목발의 지인들과 도서관, 그리고 상공회의소 등 마산의 관공서에만 배포됐는데, 책이 나오면서 관심을 갖게 된 사람이 늘어났지만, 워낙 적게 발간되는 바람에 아쉬워하는 여론이 많았다. 그로부터 1996년 1월 ‘마산야화’ 재판본이 나온다. 재판본이 발간된 것은 ‘마산야화’가 두루 읽히지 못한 아쉬움을 메우기 위한 것이라 보여 진다.

    재판본은 ‘마산문화원’에서 펴냈다. 당시 문화원장이었던 허종성은 재판본 발간이 “‘마산야화’속에 일제시대 마산지역 수탈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어 우리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 유고집을 다시 펴내게 됐다”며 출간목적을 밝혔지만, 이와 함께 초판본을 보려는 사람들이 워낙 많은 것에 따른 것이라는 말도 덧붙임으로써 마산사람들의 이 책에 대한 관심과 인기가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케 했다.

    재판본은 목발의 육필원고 원문에 충실했던 초판과는 달리 원고내용을 현대문법에 맞추고 세로조판을 가로로 바꿨으며, 고유명사를 제외한 한자를 가급적 한글로 바꿨다. 또 내용에 맞춰 사진을 새로 추가하기도 했다. 책은 500권이 발행돼 ‘김형윤기념사업회’에 보내지기도 했고, 필요로 하는 곳에 배포됐는데, 지금 이 책을 구하기는 역시 쉽지가 않다. ‘마산야화’ 한 권으로 목발은 마산을 아끼며 마산의 정의와 문화예술, 그리고 언론을 위해 애썼던 언론인으로 영원히 남아있는 것이다.

    마산출신으로 마산을 위해 살다 간 사상가며 항일투사요 언론인인 목발선생에 관해서는 새삼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싶지만, 그의 마산에 대한 애정의 소산인 ‘마산야화’를 소개하면서 목발선생을 다시 한번 되 집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겠다.

    선생은 1903년 당시 幸町이라고 불렀던 현재의 마산시 서성동 출생이다.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간 후 20세까지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가 학교를 졸업한 후 마산시절, 위암 장지연 선생을 존경해 모시고 따랐다는 기록은 전한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막노동을 하며 고학을 했으며 식민국 청년으로 바쿠닌, 크로포트킨 등 무정부주의자들의 사상에 공감하면서 스스로 무정부주의의 길을 걷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목발의 무정부주의 사상은 자유와 평등을 희구하는 정의감이 그 바탕이라고 전해지는데, 이는 아마도 식민국 청년으로서의 불평등에 따른 울분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스무 살이던 1923년 귀국해 일본인들의 불의에 저항하기 위한 일환으로 신문기자의 길을 걷는다. 조선일보와 남선일보,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으며, 1947년 마산에 내려와 불의에 항거하면서 정론직필을 주저하지 않은 향토언론인으로서의 한 길에 여생을 바친다.

    목발은 매사에 어긋남이 없고 반듯했으며, 거짓이 없이 맑고 담백한 성품을 지녔지만, 한편으로 술을 즐겨 마시면서 숱한 기행과 기벽, 그리고 위트와 유머도 상당했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또한 대단한 독서광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박학다식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무리 밖에서 술을 많이 마셨어도 집에 들어와서는 책을 꼭 읽었으며 장서가 많았다. 그의 다방면에 걸친 박학다식함을 비유해 ‘마산의 옥편’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고 한다. 목발은 젊었을 때 유랑벽으로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의 속을 태웠다고 전해진다. 호주가에다 그런 유랑벽으로 가족들의 생계가 어려워 부인이 막걸리를 팔아 연명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생활이 안정된 것은 마산일보를 맡아 경영하면서 부터다.

    언론인으로서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홍중조(전 경남도민일보 주필)는 목발이 인맥의 계보를 꿰뚫고 있는 보학의 ‘달인’이라고 기억한다. 특히 마산지역의 인맥과 관련해서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는 것. 이를테면 월영 이씨, 신월 김씨, 완월 정씨, 자산 공씨, 교방 심씨, 회원 노씨, 회원 감씨 등 토착문중의 족보는 물론 그 가문의 인물에 대한 얘기와 더불어 전해지는 평가까지를 꿰뚫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와 함께 마산의 지명과 자연에 대한 유래와 역사성에 대해서도 그 앎의 폭이 대단했다는 것. 그래서 무학산을 꼭 두척산이라고 불렀고, 무학산이라고 누가 그러면 호통을 쳤다고 홍중조는 전하고 있다. 무학산은 일본사람들이 부쳤다는 것으로 “간교한 왜놈들이 우리의 혼인 두척산 정수리에다 쇠말뚝을 박고선 무학산이라고 슬쩍 갖다 붙였다”는 것이다.

    ‘목발(目拔)’은 그의 호칭이면서 별명이다. 한문으로 읽지 않는 사람들은 ‘다리를 저는 사람’으로 여길 수 있지만, ‘목발’은 다리와는 전혀 무관하게 붙여진 호칭이다. ‘목발’은 ‘눈을 빼다’라는 뜻인데, 그에게 이런 호칭이 붙여진 얘기가 두 가지 전한다. 하나는 1925년 경 밀양의 수산에 있을 때, 농지문제로 일본인들과 조선인 농민들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진 사건에 개입해 싸우는 과정에서 한 일본인의 눈을 빼놓았다는 얘기다.

    또 하나는 마산에 벚꽃이 한창이던 어느 봄날, 일본 요정에서 가설무대를 지어놓고 일본기생들이 여흥을 즐기고 있었는데, 흥에 겨운 조선인 지게꾼이 관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일본 헌병이 욕설을 하며 끌어내자 이를 지켜보던 김형윤이 의분을 참지 못해 달려가 일본 헌병의 눈을 뽑아 버렸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되, 하여튼 김형윤이 목발이란 칭호를 얻은 것은 어떤 사단이던지 간에 일본인의 눈을 뽑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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