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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원수와 최순애
    내 고향 馬山 2020. 4. 24. 16:59

    문학과 글이 매개가 되어 쌍을 이룬 문인들은 많다. 파인 김동인과 최정희도 그렇고, 만년의 김동리와 서영은도 그렇다. 조정래와 김초혜 또한 소설과 시인으로 만난 커플이다. 문학가들이 만나 이룬 가정은 그들의 본태 그대로 문학적일까.

    이들의 전해지는 얘기들로 보면 소설적이고 극적인 요소도 있어 다소 그런 부분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보통 사람들의 그것 마냥 평범한 것이다. 극적인 것도 물론 있다. 마산을 인연으로 맺어진 지하련과 임화의 결혼은 월북 후 둘의 결말에서 보듯 비극적인 결혼으로 꼽혀진다.

    마산의 아름다움이 깃든, 온 국민의 노래 '고향의 봄'을 쓴 이원수도 그 일생의 반려가 같은 동요시인인 최순애다. "뜸북뜸북 뜸북새/논에서 울고..."로 시작되는 '오빠생각'으로 이원수보다 먼저 文才를 세상에 알린 뛰어난 여류작가였다. 이원수는 잘 알려진 것처럼 평생을 어린이들을 위한 글쓰기와 보살핌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갔다. 이런 동심의 이원수에게 최순애는 어떤 아내였을까.

    이들 부부의 만년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한 인척은 두 사람은 어렵고 궁핍한 가운데서도 "아이들 장난치며 노는 것처럼 지내셨다"고 회고한다. 벌이가 시원찮아 넉넉하지 못한 처지에서도 일년 365일 중 360일을 마실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는 이원수가 최순애에게는 '웬수'라 "이 웬수야!"라는 호칭을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구박(?)'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상은 이원수라는 이름을 빗댄, 사랑과 유머가 담긴 호칭이었고, 이 호칭을 이원수도 "교회에 나가면 원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즐겼다는 전언이다.

    이원수(1911-1981)와 최순애(1914-1998)가 만나 연을 맺은 것도 다분히 동화적인 요소가 있다. 어릴 적부터 아동문학에 심취해 활동과 글짓기에 몰두하던 이원수가 '고향의 봄'을 소파 방정환이 내던 '어린이'에 발표한 것이 마산공립보통학교(성호초등학교) 5학년이던 1926년 4월, 그의 나이 15세 때다. 하지만 이원수보다 3살 아래인, 경기도 수원에 살던 최순애는 멀리 떠난 오빠를 그리워하며 '오빠생각'을 썼고 이 동시가 이원수보다 몇 달 전인 1925년 11월에 역시 '어린이'를 통해 발표되면서 둘 간의 인연이 시작된다.

    둘과의 관계에 있어서 먼저 손을 내민 쪽은 아무래도 이원수인 것 같다. '고향의 봄'을 발표하기 전, 이원수는 '오빠생각'에 감동하고 있었고, '고향의 봄'으로 자신도 아동문학의 전국적인 반열에 함께 서면서 최순애와 서신교환을 하게 된다.

    이 무렵 이원수를 포함해 아동문학을 하던 사람들, 예컨대 윤석중. 이응규. 천정철. 윤복진 등 같은 어린이문학을 하던 작가들은 서로 간에 친교를 맺고 있었는데, 최순애의 '오빠생각'이 발표되면서 그녀에게 전국적으로 격려의 편지가 쇄도했다고 한다. 편지들 가운데 이원수의 것이 최순애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고향의 봄'을 접하고 이원수의 사람됨과 문학적 소양을 안 최순애는 이원수에 마음의 문을 연다.

    둘 간의 편지는 해를 거듭하면서 열기를 띠어갔고 이게 사랑으로 변하면서 장래를 기약하는 사이로 발전하는데 그 무렵이 1935년이다. 둘이 혼인으로 맺어지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최영주, 바로 '오빠생각'의 오빠인 최순애의 오빠다. 서신으로 사랑이 싹터 열매를 맺으려는 무렵, 이원수에게 사단이 생긴다. 항일사상의 '함안독서회'사건에 연루돼 일본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혼담이 오가는 와중에 신랑 쪽에 생긴 관재(官災)아닌가. 최순애 집에서는 혼인을 저어하는 분위기가 인다. 이런 상황에서 나서 결혼은 적극 추진한 사람이 바로 최순애의 오빠 영주였던 것이다.

    최영주도 동생 순애와 마찬가지로 방정환 등과 더불어 어린이문화와 계몽운동을 하면서 '개벽'誌를 펴내던 선각자였다. 배제고보를 나와 일본유학까지 한 최영주는 일본경찰의 요시찰인물로 전국을 떠돌다 한창 나이에 요절한, 최순애가 항상 마음에 담아두었던 잊지 못할 오빠였다. 고향 집에도 오지 못한 채 멀리 떠나버린 그 오빠를 그리워하며 최순애가 11살의 어린 나이로 지은 글이 '오빠생각'이다. '오빠생각' 노래는 홍난파가 1929년 곡을 붙였지만, 그 후 박태준의 곡으로 다시 태어나 불리어지는 게 지금의 '오빠생각'이다. 이원수의 '고향의 봄'도 홍난파 곡이지만, 처음에는 '산토끼'의 이일래가 곡을 붙였다고 하니 이 또한 묘한 인연이 아닌가 싶다. 둘다 그만큼 빼어난 명작이었다는 얘기다.

    박태준이 '오빠생각' 곡을 붙일 때 한 애기가 전한다. 박태준은 최순애의 이 글을 보자마자 곡이 떠올랐다고 한다. 곡을 써 내려가다 "서울 가신 오빠는/소식도 없고/나무 잎만 우수수/떨어집니다"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박태준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눈물이 5선지를 흥건히 적셔진 채 곡을 끝냈다는 것이다. 그만큼 아름다운 정감과 슬픔이 깃든 노래가 '오빠생각'이라는 얘기다. 최순애의 여동생 최영애도 '꼬부랑 할머니'를 쓴 아동문학가다.

    마산청년 이원수와 수원처녀 최순애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36년 6월6일 결혼해 마산 산호동에 신혼살림을 꾸린다. 이원수는 ‘함안독서회’ 사건으로 일 년 여 간 영어생활을 한 후 그해 1월 출옥했으니,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신혼살림이었다. 그 무렵 이원수는 어찌어찌해 ‘한성당건재약방’에 일을 얻어 호구로 삼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 그 이듬해 원래 다니다가 독서회사건으로 파직됐던 ‘함안금융조합’에 복직되면서 생활이 조금 펴진다. 장녀 경화가 태어난 때가 그 무렵이다. 이원수를 둘러싼 이른바 ‘부왜(附倭)’의 친일(親日)글 논란이 지펴 진 곳이 바로 이 금융조합이다.

    해방과 함께 이원수는 서울로 올라온다. 경기공업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기도 했고, 카프(Kapf) 문학에도 참여했고 박문출판사 편집국장을 맡아 출판사 일 등도 했다. 그러면서도 작품 활동은 소홀하지 않았다는 건 그가 죽고 난 후 펴내어진 방대한 규모의 ‘이원수 전집’을 통해 드러난다. 6.25동란 중 ‘1.4후퇴’의 혼란스런 와중에서 이원수 부부는 아이들을 잃어버리는 환난을 겪기도 한다. 그나마 큰 딸은 찾았지만, 아이들 중 막내 딸 상옥과 간난 사내아이 둘은 잃어버린다. 이원수와 최순애는 이들 아이들 잃은 슬픔이 평생의 멍에가 된다. 이원수는 이 비극을 동화 ‘꼬마옥이’에 담았다. 이원수가 큰 딸 경화를 멀리 제주도에까지 가서 찾은 사연은 훗날 영화로 제작된, 록 허드슨 주연의 ‘전송가(Battle Hymn)'의 한 소재가 됐다고 한다.

    이원수의 이런 험한 시절을 곁에서 평생 사랑으로 보살피고 유머로 도닥거리며 부추겨주고 격려해준 게 최순해다. 혹자는 이런 견해에 이견을 달기도 한다. 어떤 이는 “외형적으론 그럴듯한 걸맞은 부부”라는 말도 보탠다. 이원수가 살아 온 험하고 빈한한 삶 탓이겠지만, 고집스럽고 담백한 그의 인성 자체로 보아서도 이 말은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원수를 가까이서 지켜본 지인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원수와 최순애는 전생의 인연이 이승에 까지 이어진 다정하고 다감한 부부였다는 것이다.

    이원수. 최순해 부부가 마지막까지 함께 살며 보낸 곳은 서울 관악산 아래 남현동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에 가기위해 넘었던 남태령이 가까운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에 1960년대 말경 문인과 예술인들을 위한 집들이 조성되면서 이들 부부도 1970년 답십리에서 이곳에 가까스로 집을 마련해 이사 와 살았다. 서정주 시인이 바로 이웃이었다. 이 무렵 이원수는 ‘아동문학가협회’ 초대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회갑을 맞아 ‘고향의 봄’을 타이틀로 아동문학집을 낸 것도 이때쯤인 1971년이다. 이 무렵부터 세상을 뜬 1981년까지 10년간이 이원수로서는 최순애와 부부로서 가장 평안하게 보낸 시기가 아닌가 싶다.

    남현동에 살면서 이원수와 최순애의 집은 ‘뜸부기 집’으로, 그리고 최순애는 ‘뜸부기 할머니'로 불렸다. 1981년 언젠가 모 신문은 이런 기사를 싣고 있다.

    “뜸부기 할머니. 서울 동작구 사당동(지금은 남현동) 예술인마을 사람들은 이 동네에 사는 한 노부인을 이렇게 부른다. 얼핏 들으면 할머니가 뜸부기를 사육하거나 뜸부기장사를 하는 것쯤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외모의 어딘가가 뜸부기를 닮았다든지 목소리가 뜸부기 같다든지 한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칠순에 가까운 연세로는 보이지 않게 고운 피부와 수줍은 미소가 소녀같은 이 할머니는 동요 ‘오빠생각’의 작가 최순애 여사(67)다. 이웃에 사는 시인 서정주씨가 동요의 첫 구절을 따 붙여준 애칭 ‘뜸부기 할머니’가 그대로 별명이 돼버린 것이다.”

    둘은 이 집에서 알콩달콩 재미있고 정감 나게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정주 시인이 최순애의 별명을 그렇게 지어준 것은 ‘오빠생각’에서 연유한 것이라지만, 이원수와 최순애가 사는 집 또한 다정다감한 뜸부기 남매가 사는 곳이라는 것을 비유해 그런 별명을 붙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 집에서 이원수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듬뿍 배인 수상집을 펴낸다. ‘처음 만난 그대로 - 내 아내가 아니더라도 사랑했을 아내에게’라는 제하의 책에 수록된 ‘싸리꽃 울타리’라는 글에는 아내와 함께 6.25전쟁통에 잃은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배어있다. 최순애가 관악산 산골에서 캐온 싸리나무를 집 울타리로 쳤는데, 그 나무가 아이들을 닮았다는 것이고, 그래서 지은 한편의 동시를 써 아내에게 주면서 슬픔이 사랑으로 승화되고 있는 글이다.

    이원수의 또 다른 한 글에서는 문학의 꿈을 접고 평생을 가난 속에서도 반려로 함께 해 준 아내에 대한 미안함도 묻어난다. “내가 스물여섯, 처가 스물셋에 결혼했는데 실직의 가난 속에서 아내는 갖은 고초를 겪었고, 해방되자 시골에서 올라왔으나 역시 온갖 경난(經難, 경제적인 어려움)은 약한 그에게 너무나 과중하게 계속되었었다.”

    최순애는 하지만 이렇게 화답한다. “벌써 회갑을 보내버리신 분, 젊은 날보다 알뜰하게 강한 내조의 보살핌이 필요할 것 같다. 고독한 날의 마음이 더 맑도록, 약해가는 기운을 더 보태도록.”

    이원수는 1981년 1월 세상을 떴다. 아내 최순애는 이원수의 못 다한 배려 덕인지 세상을 더 살다 1998년 6월 남편 곁으로 갔다. 아마도 둘은 지금쯤 저승에서도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고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서울 남현동 시절의 이원수. 최순애 내외. 이곳에서 10여년 살던 때가 내외에게는 아마도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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