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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이즘(Capaism)'사람 2020. 9. 30. 09:11
사진 한 장이 역사를 바꾼다. 사례가 많다.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전기를 마련한 1987년 '6.10 항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한 장의 사진이다. 연세대 이 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숨져가는 보도사진 한 장의 폭발력은 컸다. 이 사진으로 민주화 시위는 폭풍처럼 번졌고 군사독재 정부는 백기를 들었다. 중요한 역사의 현장은 말이 필요 없다. 그 현장이 모든 것을 말한다. 사진은 이것을 포착한다.
보도사진을 얘기할 때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913-1954)를 빼 놓을 수 없다. 그는 종군 보도기자의 전설이다. 포토 저널리즘에서 회자되는 말이 있다. '카파 이전'과 '카파 이후'이다. 전쟁을 취재한 기자들은 카파 이전까지는 한가한 구경꾼들이었다. 크리미아 전쟁부터 1차 세계대적까지가 그랬다. 이즈음의 전쟁사진들은 전쟁 명분의 영웅성과 애국성을 강조하느라 전쟁을 마치 야영장처럼 묘사하고 있다. 전쟁의 필연성속에 아군의 도덕적 우위 등을 기념하고 찬양하고자 했다.
그러나 카파는 이런 종군기자와 전쟁사진의 성격을 일변시키는 전기를 만든다. 카파는 20세기의 전쟁을 보도하기 위해 짧은 생으로 존재했다. 그는 재능과 함께 인내와 용기, 열정을 겸비했다. 카파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그의 애인 게르다와 더불어 인민전선파에서 종군을 한다. 전선의 최전방 참호에서 뛰어나가던 병사가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극적인 순간을 잡은 작품이 Life誌에 실리면서부터 그는 세상의 이목을 끈다. 그러나 애인 게르다는 그 전쟁에서 탱크에 치여 참혹하게 죽는 불운을 겪는다.
이후 카파는 네 군데의 전장을 더 누빈다. 1944년 8월 8일, 그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한다. 상륙정을 탄 카파는 날아오는 폭탄 속에서 정신없이 셔터를 누른다. 모두 1백6장을 찍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사진은 겨우 8장. 그 가운데 포화가 작열하는 가운데 상륙을 시도하고 있는 병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었다.
Life誌의 편집진들은 "그 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는 유명한 캡션을 달았다. 이 사진은 상륙작전의 긴박한 상황을 보다 역동적으로, 그리고 전장에서의 공포에 질린 인간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파인더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초점도 맞지 않고 포연 속에 사진입자도 거칠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도리어 치열한 전쟁의 극한적 긴장상태를 더 설득력있게 전달해주고 있다.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힌 나치독일 장군이 있었다. 카파는 그의 사진이 꼭 필요했다. 그러나 이 장군포로는 등을 돌린 채 "나는 미국신문의 사고방식이 왠지 모르게 싫다"면서 포즈를 취해주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카파도 지지 않고 "패망한 독일 대장 정도를 찍는 것은 나도 싫소"라고 쏘아 붙였다. 그 순간 독일장군은 격노한 눈빛으로 카파를 홱 돌아보았다. 카파는 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고, 그 것은 나치독일의 야만성과 독선이 멸망으로 이어지는 상징성을 담은 유명한 사진이 됐다. 이 사진들은 그 이후 종군 사진기자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한다. '카파 이후' 종군기자들은 전투현장의 선두에 서게 된다.
카파는 "만약 당신의 사진이 흡족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것은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If your photographs aren't good enough, you're not close enough)"이라는 신조로 현장에 투철했던 기자였다. 그의 이런 열정과 통찰력 있는 행동주의를 가리켜 '카파이즘(Capaism)'이라 부른다. 위험을 무릅쓰는 치열한 기자정신을 일컫는 말이다.
올해가 카파 탄생 107주년이다. 이 영웅적인 종군기자의 치열한 취재정신을 되돌아보며, 우리나라 언론을 생각해 본다. 우리 언론은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 언론은 죽었다.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는 커녕 독재정권의 비리와 부패, 권력남용 등을 은폐하고 감싸주는 나팔수로서의 노릇만 하고 있을 뿐이다. 카파의 기자정신이 이즈음 새삼 돋보여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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