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영희 전 한양대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타계 소식을 접하면서, 그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는 또 두 파로 갈라지고 있다.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노력에
헌신했다는 평가는 진보진영에서 나온다.
그러나 보수진영의 그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고 매섭다.
우리 사회 좌경의식의 원조,
특히 386세대의 좌파적 사상의 은사라는 평가와 함께
그의 從北주의적인 통일관을 비판하고 있다.
그의 죽음과 관련해 이렇게 극명한 두 가지의 평가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가 우리 현대사에 어떤 형태로든 일정 부분 역할을 한 인물인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나도 리 영희 교수를 예전부터 익히 알고 좋아했다.
이에는 단서가 붙는다. 적어도 친북경향의 사상운동가로 활약하기 전까지다.
그는 우선 탁월한 기자요 언론학자 였다.
합동통신과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한양대 신문학과 교수로 보낸 그의 전력이 이를 대변한다.
합동통신 기자시절, 그의 시대적 안목을 지닌 활약상은 괄목적인 것이었다.
50년대 말 자유당정권의 격량의 시절,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의 현장을 기자의 직접 눈으로 목도하면서
써내려간 그의 기사는 시대와 현장의 생생한 기록으로 일품이었다.
특히 외신기자로서, 워싱턴 포스트에 송고한, 한국의 당시 실정을 알리는 시의성있는 기사들은
그 신문의 편집국장이 감복해 정기적으로 게재할 정도였다.
5.16 후, 리 영희는 군사정부 박 정희 의장의 미국방문에 기자로 수행한다.
워싱턴에서 그는 많은 것을 목도한다.
그 것과 팩트를 기반으로 쓴 한미정상회담 기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특종기사였다.
국가이해와 권력이 그런 기사를 좋아할리가 없다. 큰 박해를 당한다.
그의 제국주의와 반민주독재에 대한 반골기질은 아마도 이 무렵 연마됐을 것이다.
그리고 외신기자로서 취재현장과 각종 한반도에 대한 자료를 접하면서
한반도의 제반 현실을 들여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역정(歷程)'
그는 자신의 이 같은 청년시대를 이 한마디로 압축해 표현하고 있다.
리 영희는 1988년 자전적 에세이를 엮은 책을 한 권 낸다.
책 이름이 바로 '역정'이다.
'창작과 비평사'에서 펴낸 이 책의 부제는 '나의 청년시대'이다.
1929년 출생해 실향민으로 분단된 땅, 격랑의 시대에
합동통신 외신부기자로 5.16을 겪은 후인 1963년까지의 생애를 뒤돌아보고 쓴 책이다.
그는 1980년 광주사태 배후조종자의 한 사람으로 투옥돼 조사를 받으면서
이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나는 다시는 앞으로 글을 쓸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다. 상황의 포악상으로 미루어
나 자신도 다시는 글을 쓸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었다. 그 결정은
나의 지적 삶의 종말을 의미하는 처참한 체험이었다. 중정 지하실에 갇혀있는 동안
결심한 것 것이 나의 삶의 일부인 독자들에게 나의 삶을 털어놓은 글로써
지적 인생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일이었다" (책 서문)
그의 '지적 인생'은 그러나 그후 다시 꽃을 피운다.
교수로 사회운동가로 저술과 강연 등을 통해 이념활동에 매진한다.
민주화과정을 겪으면서 세상이 '좋아'졌고,
그 과정에서 그의 기여도가 인정받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사상적 이념은 확고했고, 추종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의 책을 봤을 때, 그러나 적어도 그 때까지의 그의 '역정'에서
사상.이념적 편향성은 그리 두드러보이지 않았다.
기자로서의 투철한 사명감, 그에 더해지는 정의감,
그리고 그에서 비롯되는 권력과 사회부조리에 대한 비판의식의 표출 정도이다.
리 영희의 그 때까지의 '역정'에서 느껴지는 것은 소박한 삶의 편린들이다.
첫 아이가 태어나자 마자 몹쓸 병에 걸여 잃게되는 대목에선 눈물이 나온다.
그리고 하루에 몇 탕씩의 아르바이트를 통해 어렵게 장만한 첫 집에 대한 감격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평범한 삶의 기록들이다.
말하자면 그의 그 때까지의 삶은 그가 '역정'이라고 토를 달았듯이,
아웃사이더로서 이 땅에 뿌리 내리기 위한 눈물겹고 인간적인 행적들이다.
그런 그였기에 나는 언론계 대선배로서 좋아하고 존경해마지 않았다.
(1988년 2월 리 영희는 미국 버클리대학에 머물고 있었다. '평화와 투쟁'을 주제로 한 특별강좌를 하기 위해서였다. 책의 서문은 이 때 썼다)
그러나 그는 그 무렵을 전후해서 변해가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그 이유를 과문하고 어렸던 내가 알리가 없다.
아무튼 나는 변해가는 리 영희를 그 무렵부터 잊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궁색한 변명 같지만,
그의 자전적 에세이를 묶은 '역정'이 나온 1988년까지만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이 영희(李 泳禧)가 '리 영희'로 나오고 표기되고 소개되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 이 글에서 이 영희를 '리 영희'로 쓰려니까 솔직히 좀 부담스럽다.
그 후, 그의 이념적 편향성을 두고 말들이 많아도
그저 한 귀로 흘러버리려 했지 그에 가세하려하지 않았다.
분단의 험한 시대를 온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 온 언론계의 대선배요
'역정'의 한 증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는 갖춰야할 게 아닌가하는 생각에서다.
연평도에 폭탄이 떨어지고, 전쟁의 공포가 엄습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그가 세상을 떴다.
이념의 소용돌이는 더 기승을 벌인다.
이 편, 저 편으로 갈라져 그의 죽음을 자기들 멋대로 색칠하고 있다.
그의 죽음은 그래서 더 황망스럽고 안타깝다.
명복을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