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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잘 알 것 같기도 하면서
잘 모르는 것.
멀리 있는,
나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 하지만,
어느 때,
골육에 사무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
아침 밥상머리.
간밤의 헝클어진 생각들은 그대로다.
허기?
좀 유치 찬란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때,
눈에 들어오는 한편의 詩,
가슴을 때린다.
삶은 유치하지만 그래도 찬란하다.
문득 커밍 아웃이 하고 싶은 아침,
그리고 이 한편의 詩...
바구니 속의 계란 - 최영숙 (1960 - 2003)
나는 아름다운 장기수
탈출을 꿈꾸지
결혼해 일년 반, 임신 육개월의 배를 끌어안고서
주위를 둘러싼 소리 없는 장막
저 찬란한 가을햇살을 찢고 달아나는 탈출을 꿈꾸지꿈꾸는 성
꿈꾸는 태아
문지방에 기대앉아 대문 밖을 보노라면
나가자고, 자꾸만 머얼리 저어가자고
뱃속의 태아가 툭툭 발을 차네
소싯적 내 젊은 어머니, 가을 마당 햇빛 속에 물끄러미 서 계시네나는 치밀한 탈옥수
냉정을 가장하네
뒷덜미를 끄는 햇살, 파도를 밀고 나가면 어디가 될까
갈대방석 위에 양팔 벌리고 누워 두웅-둥
나 누더기 되어 난바다로 떠내려가네
파란 하늘 파아란 구름 힘껏 들이마시며
뱃속의 아이에게 들릴 만큼 놀랄 만큼
소리질러야지
“계란 사시오, 계란 사시오오-”깨지는 건 순간이야
앞뒤 구멍 내서 날계란 후루룩 마실 때의
비릿한 뒷맛
손에서 미끄러지면 끝장인 껍질
삶의 껍질을 끝까지 벗겨본 적 있던가
바구니 속의 계란 삼십개
고이 들고 온 이것이 인생의 황금기였나
미끈, 바닥으로 떨어뜨리면
한꺼번에 계란프라이 해먹어도 좋을
잘 달구어진 가을햇살, 햇살- 최영숙 유고시집 '모든 여자의 이름은' 중에서
“이제 내게 허락된 시공간을 받아들여야할 때가 된 것 같다.미리 써보는 이 후기가 수정되길 바라면서 두번째 시집은 내 손으로 엮기를 바랐으나,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한다.살아,많은 게 슬펐지만 또한 기쁘고 아름다웠다.사랑하는 이들이여,이제는 안녕.”
시집 뒤에 붙어있는 ‘미리 쓰는 후기’가 아리다.2001년 심장병에 더해 루프스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2003년 10월 29일 합병증으로 43세의 생을 마감한 최영숙(1960∼2003) 시인.3주기에 맞춰 출간된 유고 시집 ‘모든 여자의 이름은’(창비)은자신의 몸에 차오른 죽음을 어디든지 데리고 다녔던 동행(同行)의 기록이다.죽음과의 동행이라고 했지만,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에 대한 기록은 그 고통으로 인해 과잉되게 마련인데최영숙의 시가 뛰어난 지점은 그 과잉을 절제하면서 삶과 생활을 다독이고 있다는 데 있다.
그중에서도 좁은 분식집의 고요한 풍경을 그린 ‘옛날 손만두집’은 만두집 여자의 손에서만두가 빚어지고 김이 펄펄나는 솥에서 익어가는 과정을 통해 탄생과 죽음의 문제를 직관하는 수작으로 꼽을 만하다.“어쩐지 말이 없는 그녀는 내가 김밥을 다 먹도록 하나 하나 만두를 빚어나가는 것이,저 먼 누이나 오라비쯤 되어 안 보는 듯 나를 본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나 또한 암말 않고 부어주는 오뎅국물을 마시며 나의 오랜 出이 여기서 끝나주었으면 하였고”
만두집 여자와 시적 화자 ‘나’는 서로를 슬쩍슬쩍 보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다.여자는 “둥글고 얇아진 만두피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꾹꾹 소를 눌러넣고”‘나’는 그때마다 김밥을 하나씩 먹는다. 시는 이렇게 종결된다.“솥단지 안에 얌전히 들어앉은 만두꽃이 꿈인 듯 만개한지라,이마가 뜨거운 만두를 집어내고다시 새 만두를 올려놓으니,내가 그녀의 손안에서 빚어졌을 때다만 만두로서 순해져서는//가리라,저 화엄의 거리로 지금 난 익어가는 중이니”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익어가는 중’이라고 쓴 의미 전환 방식이야말로처연한 부활 의지 앞에 죽음의 무릎을 꿇게하는 득의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죽음은 최영숙의 몸을 관통해 시가 되었다. 삶은 때로 죽음에 의해 견인되기도 하는 것이다.재활용품을 수집하는 할머니에게 한끼 아침 식사를 차려준 시인은자신에게 ‘애기 엄마,복받으시우’라는 말을 남기고 간 할머니를 떠올리며 이렇게 읊조린다.“꽃 같은 시절,달랑 신랑 사진 한장 들고 찾아간 시집살이부터/씨앗 보고 집 나와 서울 공장으로 다시 시골로,/아들 낳아 지금은 며느리와 함께 산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마지막 식사’ 일부).이렇듯 시에 등장하는 것은 할머니 어머니 딸 며느리 수양어머니 아줌마 소녀로 호명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여성이다.
정철훈 전문기자'컬 렉 션'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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