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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과 죽음
    村 學 究 2020. 2. 10. 08:04

    죽음이 잠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가져왔다. 이즈음 들어 그게 좀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것은, 특별히 아픈 데도 없는데도 아침, 잠에서 깨었을 때 어떤 괴롭고 아픈 증상이 지속적으로 생겨나면서 나름 그런 쪽으로 곰곰이 생각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이라는 게 무엇인가를 놓고 생각해보면, 기본적인 관점에서 생물학적 인간으로서의 육체적 활동이 정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몸이 쇠약해져 더 이상 몸의 기능이 움직여지지 않을 때를 우선 꼽을 수 있겠다. 이와 더불어 병이 깊어질 때도 마찬가지다. 병이 생체학적으로 몸이 기능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경우다. 사고로 인해 죽음에 이른 것도 궁극적으로는 물리적인 충격이나 훼손에 의해 신체의 기능이 정지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잠은 물론 죽음과 차이는 있다. 활동이 중지는 되지만, 신체의 기능이 망가진 것이 아니고 신체 리듬에 따른 요구에 따라 일정 기간 휴면모드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잠이다. 그러나 잠 또한 깊어져 깨어나지 못하게 되는 수가 있다. 못 깨어나는 경우를 어떤 말로 대체할 수 있을까. 죽음같은 잠, 그러니까 죽음으로 가는 상태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게 없을 것이 아닌가 싶다. 가사(假死) 상태로 진행되는 잠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깨어나지 못하는 깊은 잠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그렇게 하는 방법이 바로 수면제를 사용해 깊은 잠으로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자살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깨어나는 것과 못 깨어나는 것과의 차이가 있지만 심신 활동의 중지라는 측면에서 잠과 죽음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는 있는 것 같다.
    잠은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 잠이 깊어지고 자는 시간도 길어진다.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진다고들 하지만, 이는 감성에 기인한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나이가 많이 든다는 것은 노약해지는 것을 말한다는 관점에서 신체의 모든 기능 또한 약해져 가므로 휴식을 가지는 신체상의 기전, 즉 잠이 많고 깊어지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현상이다. 노인이 계신 집에서 아침 무렵 노인이 자는 방문 앞에서 "기침 하셨습니까"라고 인사를 올리는 것은, 노인의 깊은 잠이 자칫 죽음으로 이어지는 불상사와도 관련이 있는 것을 우려하는, 노인 어르신을 보살피는 우리의 전통적인 인사라고 할 수 있다.
    노인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이 경우 보통 자연사라고들 한다. 자연사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것은 편안함, 곧 편안한 죽음이다. 편하게 그냥 자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다가 죽은 노인에게 그 말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는 한 번 따져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 자고 아침을 맞을 때면 몸이 다시 정상적인 기능 상태로 돌아와야 한다. 헌데 그 신체기능이 노쇠화나 급작하게 생긴 다른 이유로 인해 돌아오지 않는다. 그럴 경우 비록 수면의 상태이기는 하나 노인의 몸과 의식에서는 살려는 편과 죽으려는 편과의 생과 사의 사투가 벌어지면서 생사가 갈리는 것이다. 의지와 환경에 따라 몸의 기능이 승하면 살아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어지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경계를 가르는 것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단순한 것이다. 젊음과 늙음, 바로 생의 연륜인 나이인 것이다. 젊은 나이면 발딱 발딱 잘 일어나고, 늙은 노인이면 잘 못 일어나는 것이고, 영영 못 일어나는 것이 죽음인 것이다. 그러니 아침 잠 자리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은 것으로 보이는 노인일지언정 그 얼굴과 표정은 편안해 보이더라도 기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에는 엄청난 과정이 있었다고 봐야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즈음 나는 이른 아침에 잠에 깨어날 때가 두렵다. 여간 편치않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괴롭다. 굉장히 불편하고 힘이 든다. 꿈자리가 사납지 않아도 그렇다. 잠에서 깨어나기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괴롭고 뭔가에 억눌리기 때문에 잠에서 깨 눈을 뜨는 것인지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괴롭다.  몸이 오그라드는가 하면, 어디 깊숙한 곳으로 빠져들기도 하는 느낌인데,어느 부분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흐미한 통증도 수반하고 있다. 기분도 불길하다. 한 참을 잠자리에서 그런 상태로 어쩔 줄 모르고 누워있는데, 어느 때는 신음까지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다. 어느 날 아침인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죽을 때가 이럴 것이라는 것. 죽음 직전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는 안 죽어봐서 잘 모른다. 그런데도 막연히 그런 느낌이 든 것은, 한 마디로 그런 상태가 뭔가 축축하고 어둡고 불길한 기운에 사로잡히는 것이, 부지불식간에 아, 이렇게 해서 죽는구나 하면서 죽음이 떠올려졌기 때문이다.
    잠과 죽음과의 관계로 볼 때 나의 이 같은 증상은 어떤 경우라서 그런 것일까. 딱 잡혀지는 이유는 알 수 가 없다. 다만 느낌으로 오는 것은 있다. 어정쩡한 나이 탓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직 노인도아니고 그렇다고 청춘의 나이도 아닌 탓에의 나이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침 잠자리가 그처럼 편하지 못한 게 아닌가하는 것이다. 신체의 기능이 그래도 아직까지는 미미하나마 작동하고 있는데서 비롯되고 있는, 어느 지점에서의 살고자하는 기운과 죽어가는 기운의 충돌이 그런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 않는가고 생각한다. 그래도 살아있다는 것은, 쉬운 말로 신체의 기능이 아직 죽을 나이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괴롭고 편치 않다는 것은 그 지점이 아슬아슬하니 그럴 것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그러니 충돌 지점에서 신체의 죽으려는 기운이 강하면 속된 말로 잠자리에서 어느 날 한 방에 훅 갈 수도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에 대처할 마땅한 방안이 현재로서는 없다. 아니 죽는 그날까지 영영 없을 수도 있다. 잠과 죽음을 이렇게 연계시키고자 하는 것에서 지극히 추상적이지만 뭔가 위로가 되는 대체적인 방안이 나올 것 같기는 하다. 그것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그게 과연 뭘까.

     

     

     

     

     

    Death Mask: 1908 - New York circa 1908. Making a plaster death mask. 8x10 glass negative, George Grantham Bain Collection, Library of Congress. (photo from www.shorp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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