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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아웃, 혹은 필름 끊기기세상사는 이야기 2010. 8. 23. 07:22
엊저녁에 텔리비전에 술꾼들이 유의해서 보아야 할 게 나왔다.
술 많이 먹으면 이렇게 된다는, 말하자면 과다 음주를 경고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알콜성 치매인데, 쉽고 친절하게 도표와 이정표까지 곁들여 준다.
알콜성 치매의 전단계로서, 그 프로는 블랙아웃을 들고 있다.
블랙아웃(blackout)이 무엇인가.
가만이 보니 우리 말로 '필름 끊어지는 것'이다.
원래 이 말은 전기가 나가는 정전, 혹은 소통이 끊어진다는 뜻인데,
알콜중독에 적용하자면,
술 마시고 기억이 지워져버린다는 뜻에서 그렇게 쓰여지는 것이다.
전날 밤 술 마신 게 술 때문에 지워져 아침에 생각이 나지 않는 것,
그 게 바로 블랙아웃이라는 뚯이다.
방송은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길을 그려놓고 설명을 한다.
일단 한번이라도 전날 술 먹고,
다음 날 기억에 아무런 지장이 없으면 서울이라는 출발선상에 있다는 것.
그러나 다음 날, 기억이 어찌 희미하고 갈팡질팡 스럽다면 수원 쯤에 와 있다는 것이고,
기억이 전혀 없는 블랙아웃이면 이미 대전까지 와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회수에 관계없이 일단 한번이라도 그렇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대구나 부산까지 가버리는 것은 인생 종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대전까지 가는, 말하자면 한번이라도 블랙아웃이 오면 알콜을 삼가해야 한다는 경고다.
대전을 넘어 대구까지 가면 알콜성치매의 전조가 나타나고,
더불어 간경화로, 그리고 부산까지 가면 알콜성 치매에 간암 등으로 인생을 종친다는 말이다.
여자MC가 나름대로 재미있게 설명을 하곤 있었지만,
보면 볼수록 재미보다는 좀 으시시해져가는 방송이라고나 할까.
그러면 나는 지금 어디 쯤에 와 있을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그 방송대로라면 지금쯤 수용소 내지는 무덤에 있어야 한다.
왜 그런가.
'블랙아웃 상습범'이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술을 마신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필름 끊어지는 현상도 일찍부터 시작됐다.
신혼 때인 1980년 초부터 그랬으니 햇수로도 30년이 다 돼간다.
한참 일할 때인 3, 4십 때는 마셨다 하면 그랬다.
술 마시면 응당 그러는 줄로도 알았고.
블랙아웃으로 인한 웃을 수도, 웃지 않을 수도 없는 얘기도 많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우리 큰 아이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겠다.
가족들이 모인 어느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그렇게 말한 큰 아이다.
나는 왜 그렇게 술만 마시면 필름이 끊어지는가.
술 마시는 태도와 방법이 문제일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나름대로 내린 분석아닌 분석이 있다.
술을 마실 땐 술에 온전히 나를 맡겨버리기 때문이라는 것.
그렇게 3,4십년을 마셨으면 앞에도 얘기했지만, 나는 죽거나 폐인이 돼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비록 빌빌대고는 있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다.
이즈음도 나는 마셨다하면 어쩌다 가끔 블랙아웃을 탄다.
아침, 그 알싸하고 몽롱한 수박냄새가 입에 감도는 작취미성에 젖는다.
얘기하다 보니, 나는 어째 방송 내용을 비껴난 입장에 있는 것 처럼 둘러대고 있다.
그러나 방송이 맞을 것이다. 내가 비정상일 것이고.
술 많이 마시는 것, 결코 자랑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자랑일 수도 없고.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 나이에 다시 개과천선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