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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香과 추억, 마산 龍馬山
    추억 속으로 2010. 12. 29. 17:16

    용마산(龍馬山)은 마산에 있는 산입니다.

    오래 된 동네들인 오동동, 산호동의 구마산 지역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얼마 안 되는 뒷동산 같은 곳이지요.

    그래서일까, 이즈음은 용마산이라고 부르지 않는 모양입니다.

    이번에 내려가 보니 언제부터인가 용마산 대신 '산호공원'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됐든 우리들 어릴 적에는 그 이름도 우람한 '용마산'이었습니다.

    산 이름에 용과 말이 들어갔으니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느껴졌었겠지만,

    기실 마음 한 구석에는 크고 높은 산 이미지 보다는

    뒷동산 정도의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는 곳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어떤 게 용마산의 실체일까요.

     

    용마산에 대한 첫 기억은 국민학교 입학을 전후한 것으로,

    떠올리기에 그리 좋고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그 산에서 있은 해괴망칙한 사건 때문지요.

    그 게 유언비어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해괴망칙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동네 사람 신고로 그 산 숲 속에서 발견됐는데,

    두 사람이 달라 붙어있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남자가 여자 몸 위에서 죽었다나 뭐라나.

    하여튼 그 소문이 당시 마산에 쫙 퍼졌습니다.

    나중에 좀 커서 우리들끼리 킥킥대면서 좀 유식한 말로

    그 사건을 떠올리면서 하던 말, 그 게 바로 '복상사'였던 것이었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학교와 부모님들로부터 엄명이 떨어졌습니다.

    해지고는 올라가지 말라는 것.

    그리고 봐도 못 본체 하라는 것.

    그 짓을 하다 놀라면 그렇게 될 수도 있으니,

    봐도 그냥 못 본체 지나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용마산 '詩의 거리'에 조성된 시비들)

     

     

    용마산은 잘 가꾸어져 있었습니다.

    각종 비석들이 많은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비석들 중에서도 시비(詩碑)가 단연 많았습니다.

    노산 이 은상을 비롯해 화인 김 수돈 선생, 권 환 선생, 천 상병 선생,

    정 진업, 박 재호 선생 등 주옥 같은 글로

    마산과 마산사람의 심성을 달래고 어루만져 주었던 선배들이 비석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 선생의 시비들은 한 곳에 함께 모여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붙였습디다. '詩의 거리'라고.

    정 진업 선생과 박 재호 선생이 기억납니다.

    1980년대 초, 막걸리 집에서 몇 번 뵌 적이 있었지요.

    두 선생들 중 한 분은 당시 혼사를 앞둔 저의 결혼식 주례를 자청하기도 했었지요.

    그러나 그 게 이뤄지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도 모르겠구요.

    정 진업 선생은 용마산 '詩의 거리'에서 '갈 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박 재호 선생은 '간이역'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花人 김 수돈 선생의 대표시 '우수의 황제'가 새겨진 시비)

     

     

                                                                                  (권 환 선생의 대표시 '고향'이 새겨져있는 시비)

     

    용마산의 시비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게 있습니다.

    이 원수 선생이 고향 마산을 노래한 시로,

    대한민국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고향의 봄' 시비입니다.

    1968년 가을 무렵이었습니다.

    용마산에 이 원수 선생의 '고향의 봄' 시비(詩碑)가 세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것을 '취재'하러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원수 선생을 그 때 처음 뵈었습니다.

    가녀린 몸매에 검은 뿔테 안경을 썼던 모습.

    엷은 가을 볕, 그리고 소슬바람에 팔랑이던 억세풀 사이에

    드문드문 서서 함께 부르던 '고향의 봄'이 생각납니다.

    그 때 찍었던 사진들이 몇 장 있습니다. 코니카 사진기로 찍었던 흑백사진들이지요.

     

    1977년 봄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그 곳 신문사에 견습으로 들어간지 몇 날 안 되었을 때였었지요.

    그 때 무슨 마음으로 용마산을 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무에 기대서서 호수같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떤 소년이 내 앞에서 나랑같은 모습으로 있는 줄 몰랐습니다.

    안면이 좀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신문사 윤전부 사환을 하던 고학생이었습니다.

    이름이 나와 같았습니다. 무슨 영철...

    왜 산에 올라와 여기에 있느냐.

    그냥요.

    두 눈에 궁기가 느껴졌습니다.

    배 고프제?

    ...

    공자 가운데 토막 같은 소리를 늘어 놓았습니다.

    희망을 잃지 말아라.

    고난 끝에 낙이 온다.

    열심히 공부해라.

    가끔 톨스토이, 푸쉬킨 등의 말도 섞었을 것입니다.

    누런 궁기에 근심 가득한 얼굴의 그 소년은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이 원수 선생의 '고향의 봄' 시비)

     

     

    다른 한 분의 비석은 좀 특이한 것입니다.

    '불망비(不忘碑)'이지요.

    고인의 생전 업적과 정신을 잊지말고 계승하자는 뜻에서 세우는 것인가 봅니다.

    그 불망비는 김 형윤 선생을 위한 것입니다.

    김 형윤 선생은 그 분 생전에 뵌 적은 없습니다만,

    그 분의 행적과 사상 등은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마산이 낳은 훌륭한 언론인이지요.

    그 분을 빼고 마산 언론사를 운위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그 분이 남긴 족적은 큽니다.

    그 분의 호가 뭔지 아시는지요.

    '목발'입니다. 한문으로 '目拔', 즉 눈을 뺀다라는 뜻이지요.

    왜 '목발'인가.

    일제강점당시, 왜놈 순사의 눈을 두 손가락으로 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선생은 언론인이자 강점된 식민지 조국의 아픔을 누구보다 가슴 아파한 애국지사였던 것입니다.

     

     

                                                                                                  (김 형윤 선생 '불망비') 

     

     

    '김형윤 불망비'를 지나 충혼탑 쪽으로 올라가니 눈에 익은 비석이 하나 나옵니다.

     '대마산 항도제 선언문 碑'가 그 것입니다.

    1966년이었지요. 문학과 예술의 도시,

    마산의 전통을 이어서 발전시켜 나가자는 취지로 마련된 게 '마산 항도제'입니다.

    그 축제의 정신을 되새겨 후세 마산사람들에게 남기기 위해 세운 게 이 비석입니다.

    그 때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제 1회 항도제 전야제 때 밤 세워 마산거리를 배회했던 기억이 납니다.

     

     

                                                                                             ('대마산 항도제 선언문 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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