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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늘그막의 '여자친구'들
    사람 2021. 9. 10. 05:40

    여자친구들이 몇 있다. 손에 꼽을 정도다.

    여자친구들은 물론 여자들이다.

    70줄 늘그막에 이런 말을 하면 좀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 볼 필요는 없다.

    여자친구들 당사자들이 들으면 좀 서운하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으나,

    그들이 여자들이긴 한데 시정에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그런 차원의 느낌은 당최 들지 않는, 그야말로 동무같은 친구들이다.

    늘그막이지만 그래도 남자인데,

    무슨 그런 속 보이는 말을 하느냐는 반문이 있을 것이다.

    이성간에 친구가 될 수가 있는 것인지 하는 상투적인 경구를 들먹이기도 한다.

    나도 남자인 만큼 이성과의 알고 지냄에 있어 왜 그런 생각이 없겠는가.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여자친구들하고 있을 때는 그런 느낌이 없다.

    그래도 이상한 눈치로 깐죽대는 주변들이 있으면, 이런 말로 시비를 차단한다.

    마누라 하나도 건사하지 못한다. 그 주제에 무슨 딴 여자까지를...

    그런데 좀 묘한 것은 그런 여자친구들이 사회생활을 접고 은퇴를,

    그러니까 말하자면 백수가 되면서 생겨났고 그들과 잘 어울리게 됐다는 것이다.

    현직에 있을 때, 막말로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는 없던 여자친구들이,

    백수 신세가 되니까 생기더란 얘기다.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백수로 빈둥거리면서 하는 일은 없어지고

    백수 처지에 걸맞게 놀 일만 많아졌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전에 좀 알고 지내던 사이가, 시간이 나면서 만나고 보니

    친구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더러 그렇지 않게 친구가 된 여자들도 있다.

    알고 지내던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그 친구의 친구들과 함께 어우러져 같이들 친구가 된 경우다.

     

    우리들은 주로 술집에서 만난다.

    다들 70줄의 나이들이고, 자기 가정과 얼굴에 책임을 질 나이인 만큼

    서로들 술집에서 노닥거린다 해서 그렇게 책망 받을 일은 아닐 줄 안다.

    그이들은 술도 잘 마신다. 나와 나의 ‘남자친구'들이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시니까,

    당연히 여자친구들도 그런 쪽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하고, 집안 얘기도 나눈다.

    마누라 얘기도 나오고, 남편과 자식들 얘기도 나온다.

    그리고 기분이 좋고 업되면 노래방에도 간다. 지금은 코로나로 쉽지가 않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스스럼없이들 논다.

    가벼운 의논거리가 있으면 같이 생각을 나누고, 부탁할 일이 있으면 부탁도 한다.

    흔히들 나이가 들수록 여자들의 정신연령이

    남자들의 그 것보다 높아진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내 여자친구들은 나와 동갑이거나 한 살 아래, 아니면 한 살 위다.

    그래서 그럴까. 그들의 나를 대하는 태도도 그 수준이다.

    서로 말을 놓고 해도, 뭔가 듣기에 가끔 누나 같은 말투로 얘기를 한다.

    그러면 나 또한 손아래 동생처럼, 토 달지 말고 이야기를 잘 받아준다.

    그리 하는 것이 분위기를 살려주고 ‘우정’을 돈독하게 하는 일이다.

    심각하거나 진지한 대화는 없다.

    심각하고 진지하면 안 된다. 그건‘철칙'이다.

    그저 세상 살아가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느낀

    가볍고 피상적인 얘기들을 주고받는다.

    이런 자리에는 이성(異性)의 느낌이 끼어 들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이 여자지만 친구라는 것이다.

     

    그 여자친구들도 이제는 물론 예전 같지는 않다.

    더러는 몸이 아파 기동이 어려운 처지도 있고,

    이런저런 집안 문제 등으로 운신의 폭이 좁아진 친구들도 있다.

    말하자면 나의 여자친구들 가운데 이제는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상대가 줄어진 것이다.

    그저께는 모처럼 한 여자친구를 만났다.

    코로나로 못 본지 꽤 되는 친구인데, 서로들 알고 잘 지내는 나의 한 해 선배와 함께 만났다.

    친구는 딸과 함께 나왔다.

    그 딸의 일터가 마포 공덕동에 있기에 그곳 한 주점에서 만났다.

    그 친구는 나와는 어릴 적부터 알고지내는 사이다.

    부모들끼리도 물론 잘 알고 지냈다.

    그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지만, 어릴 적에는 서로 내외가 심했다.

    서스럼없이 만난지는 역시 내가 백수가 된 이후다.

    그 친구는 어릴 적에 시쳇말로 '짱'이었다.

    인물도 이쁘고,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하고,

    하여튼 우리 동기들 중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중.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사실 그 친구 앞에서

    말도 잘 못할 정도로 위축되기 일쑤였다.

    나 뿐만 아니라 우리 동기들 대부분이 그랬다.

    그 친구와 이제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터놓고 지낸다. 살다보니 어떻게 그리 됐다.

    그 친구는 이제 여자친구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다시피 해 가끔씩 만난다.

    그래서 느낌이 좀 살뜰해지는 경우가 더러있다.

    그 친구는 특히 다른 우리 동기들의 이런저런 친목모임이나 대소사들을 챙기는데

    아주 적극적이고 정성스럽다.

    그래서 어쩌다 술잔을 기울이면서 고마움을 표할라치면, 정색을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렇다.

    "와 그라노, 우리 친구 아이가?..."

    나의 공치사적인 말이 무색하게 그 친구는 '친구'라는 말로 제압을 해 버린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럴 것이다.

    그 친구는 분명 나의 '여자친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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