村 學 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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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하고, 부끄럽고村 學 究 2020. 7. 12. 08:48
새벽 산책 길에 마주치는 노부부가 계신다. 거의 매일 마주친다. 조용 조용한 걸음인데, 항상 할머니가 앞서고 할아버지는 뒤에서 따라간다. 마스크를 쓰고 계시니 얼굴은 안 보여 잘 모르겠으나, 곱게 늙으신 부부 같다. 할머니는 묵주를 손에 쥐고 걷는 걸로 보아 가톨릭 신자일 것이다. 묵주기도와 함께 기도를 하고 걸으시는데, 그 할머니를 뒤따라 걷는 할아버지는 흡사 순례자 같다. 나도 묵주를 손에 들고 걷는데, 산책 길 어느 지점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뭐랄까, 반갑기도 하면서 어떤 동병상련의 처지가 느껴졌다. 독실한 신자는 물론 묵주기도가 일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신자들도 많다. 말인즉슨 새벽에 묵주를 들고 기도를 바치는 건 일반신자들로서는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나로서는 그런 이유가 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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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9일村 學 究 2020. 6. 29. 08:36
오늘 '묵주의 9일기도' 56일 째. 기도를 바치는 정해진 룰에 따른 마지막 날이다. 내 생애 처음 해본 묵주 9일기도다. 5월 5일 시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도를 드리게 해 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께 감사를 드렸다. 절절한 마음이었다. 오늘 새벽 길 기도 중에 유독 떠올려지는 장면과 말씀이 있다. 예수님이 수난을 앞두고 겟세마니에서 사람의 아들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 42). 묵주 9일기도를 바치면서 바람이 왜 없었겠는가. 애시당초 기도의 시작이 그것이었지 않은가. 그러나 기도를 바치면서 마음은 무거워져 갔고, 나의 바람의 생각은 자꾸 엷어져 갔다. 간절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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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기도 55일 째村 學 究 2020. 6. 28. 08:53
오늘로 묵주기도 55일째. 이제 하루 남았다. 2박 3일 마산을 다녀오고, 어제 북한산 산행으로 몸이 피곤에 절었으나, 새벽 4시도 전에 눈을 떴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마리아기도회성당이 보이는 곳에서 55일 째 묵주기도를 시작하고 걸었다. 생태습지공원으로 걷고 있는데, 대장천 천변 어느 길에서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묵주기도를 잠시 멈추고 일출의 장관을 한참 서서 보았다.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성모송 기도가 입에서 흘러 나온다. 친구 관형이 집 사람이 뇌출혈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얘기를 어제 들었는데, 그 생각이 났고 그와 함께 관형이 집 사람을 위한 기도가 흘러 나오는 것이다. 관형이 말 소리를 알아 듣는지 못 듣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아내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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他 山 之 石村 學 究 2020. 6. 21. 14:02
새벽 산책에 나서는 길은 동네에 있는 생태습지 공원이다. 목재 데크 길로 조성을 해 놓은 곳인데, 그리 길지가 않고 뱅뱅 도는 길이다. 여기서 매일 어떤 분을 만난다. 내 또래 쯤 된 분인데, 혼자서 걷는게 나에 비해 상당히 활력이 있고 걸음걸이도 빠르다. 데크 길을 뱅뱅 도는 것이니 어느 지점에서인가 몇 차례 서로 마주치며 지나게 된다.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인가 마주치는 걸 꺼려하는 걸 알았다. 이유는 이 분에게서 유난히 크게 들려나오는 대중가요 때문이었을 것이다. 닐리리 맘보도 있고, 매화타령도 있고, 하여튼 별 노래가 이 분 포켓으로부터 나온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걸 들으며 걷는 것인데, 아침부터 듣기에는 좀 요상스런 노래들이라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오늘 새벽에도 몇 차례 어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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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답이다村 學 究 2020. 6. 21. 09:46
마라톤을 즐기는 한 고등학교 후배가 있다. 그리 잘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다. 사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것과 마라톤 유명세 탓으로 여기 저기 오르 내리는 그 후배의 이름 석 자, 딱 그 정도로만 알고있는 처지다. 이 후배는 보기에 마라톤 풀 코스를 아주 쉽게 뛴다. 풀 코스 완주만 70회 정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후배는 마라톤 완주를 한 후에 자신의 SNS에 후기를 올린다. 그 글들에서 가끔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바로 "몸이 답이다"는 것. 처음 그 대목을 접했을 때는 이게 무슨 말인가 했다. 그런데 몇 번 접하니까, 나름으로 이해되는 구석이 있었다. 그 말은 마라톤을 완주케 한 자기 몸에 대한 자신감일 것이다. 42.195km를 뛰게 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런 저런 거 따질 필요없이 몸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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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다, 혹은 지나간다村 學 究 2020. 6. 16. 08:01
오늘 어슴프레한 새벽의 산책길. 천변 길을 생각에 잠기어 더듬더듬 걷고있다. 자전차 한 대가 어둠 속에서 후-욱 하며 내 곁을 스치듯 지나간다. 좀 놀라 멈칫거리는데, 자전차는 벌써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늙수그레한 영감님이 천연덕스럽게 손을 흔들며 자전차와 함께 가고 있다. 내 곁을 툭 스치듯 지나가는 낡은 자전차와 늙은 영감, 그리고 그가 흔들어대는 손. 이상교 선생이 보내 준 책의 한 글이 생각나 집에 와서 찾아보았다. "삶이란 어떻게든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러니 어서 지나가게." ('지나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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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첫 날, 묵주기도 28일 째村 學 究 2020. 6. 1. 08:02
6월의 첫날이다. 매일 새벽 기도와 명상으로 걷는 산책길에서 스치며 만나뵙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신다. 항상 분홍색 슈트를 입은 모습이기에 멀리서도 눈에 잘 띈다. 한달 전 처음 지나쳤을 때 상당히 불편한 걸음걸이의 모습이셨다. 지팡이에 의지해 느릿느릿 걸으시는 모습이 아마 다리나 관절, 허리 쪽에 이상이 있어 그러시는 걸로 보였다. 지나치면서 슬쩍 보는 얼굴도 그 안색이 안 좋으셨다. 항상 찌푸린 모습이었다. 오늘 새벽, 내가 걷는 길을 한 바퀴 돌아서는데, 저 멀리 그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인사라도 한번 드려볼까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문득 할머니의 표정이 떠 올라 그냥 그대로 지나치자고 마음을 먹었다. 나는 매일 걷는 그 방식 그대로의 패턴으로 걸었다. 할머니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